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실존(實存)이 본질(本質)에 앞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예를 들어 가위는 무언가를 자를 수 있도록 고안된 존재로서, 자르는 목적으로서의 '본질'이 가위라는 '실존'보다 앞선 일종의 발명품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사르트르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은 어떤 원인도 목적도 없이 그저 세상에 던져진, 즉 피투(被投)된 존재라고 한다. 그런데 아무런 존재의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저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인간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속되거나 결정되는 것 없이 극도로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에 있는 C(=choice, 선택)를 통해 미래로 자신을 끊임없이 던지는, 즉 기투(企投)하는 존재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무신론적 주장은 19세기 이후 인간 사회 발전 과정에 끼치는 신적 의지 및 영향력의 완전한 상실을 의미했다. 덕분에 인간은 고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던 과학기술의 혜택을 등에 업고 무수한 질문에 대한 인간 나름의 선택을 해 나가면서 문명을 발전시켰다. 물론 우리의 시대는 구약성서 『판관기』에 나오는 구절처럼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대'이기 때문에 파시즘이라든지 주체사상이라든지 한참 잘못된 선택지를 택했던 인간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대체로 인류 문명과 삶의 수준이 과거보다 개선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에 우리가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ㅡ 과거 인류 사회를 옥죄었던 어떠한 틀도 없이 극도의 자유를 구가하는 인류가 자신이 맞닥뜨린 문제에 대해 자신들 나름의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고 대응하면서 사회가 점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즉 진보(進步)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상가들에게 종교는 진보를 가로막는 거대한 수구(守舊)에 지나지 않았고, 타파되어야 할 미신과 다를 바 없었다. 과거 '암흑 시기'와는 달리 인류는 자신들의 무한한 발전을 스스로 이룩할 지성을 가진 존재였고, 다른 생명체는 해낼 수 없는 것들을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즉, 인류 사회의 발전은 인류의 위대함과 존엄성을 재확인시키고, 그렇게 재확인된 인류의 위대함과 존엄성은 더 높은 차원의 발전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면서 두 믿음 사이에 상호 상승 효과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이 상호 상승 효과는 파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인류 사회의 발전은 인류의 위대함과 존엄성을 고양시키지 못하게 되는데, 자원의 고갈, 기후 변화, 환경 오염이 한 몫을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정교하고도 모든 기능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기계의 발전 때문이다. 1) 이제 인류는 더 이상 위대하지 않다 ㅡ 호모 사피엔스 수만명이 해낼 일을 기계 하나가 빠른 속도로 간단히 해내고, 인류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창의력, 예술적 영감, 번뜩이는 재치 역시 무섭게 확장하는 기계의 능력 범위 안에 포함되고 있다. 2) 그리고 인류는 더 이상 존엄하지 않다 ㅡ 인류 전체가 과거 천년 전보다 더 부유해졌고, 사람을 억압하는 정치 체제가 대부분 해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빈부격차와 불평등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잃고 있다. 각종 재해가 발생하는 현장과 굶주린 거리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비참하게 짓밟히는 장면을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목도(目睹)하고 있다.


저출생 문제가 늘 이슈가 되지만, 사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생산 및 관리 과정이 완전하고도 효율적인 자동화 공정으로 이뤄질 수 있다면 신생아 수가 적은 것은 결코 문제가 아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도 언급했듯이 이런 기계 문명 하에서는 지구에 사는 인류의 숫자는 10억 이하가 되어도 오히려 많을 지경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인구가 70억에 가까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 문명 발전에 하등 이바지할 것이 없는 잉여 종(種)으로 전락하고 말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사르트르가 이야기한 B와 D 사이의 C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인간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외에는 사회 진보를 위한 그 어떠한 선택지도 손에 쥘 수 없다. 인간의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는 말도 좋은 시절의 이야기지, 이제는 실존 자체에 질문을 던지게 되는 시기가 곧 온다는 것이다. 인간이 내재적 가치를 상실해버리는 시기에 '인간이 왜 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종교가 부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모든 과학과 기술, 경제, 정치가 인간 존재의 이유, 삶의 이유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않으나 오직 종교만은 여전히 '당신은 의미 있는 존재'라는 케케묵은 구닥다리 이야기를 선사해 줄 수 있다. 고도로 발전된 기술의 혜택을 누리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겐 이것이야 말로 '인민의 아편(Opium des Volkes)'이겠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많은 이들에게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라고 이야기하는 구절에 위로를 받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류 사회 및 경제에 기여하는 바 하나 없이 살아 숨쉬는 것이 '죄'로 여겨질 비참한 현실 속에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선언하면서 스스로 죄인, 세리, 이방인, 창녀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그의 음성은 다시 한 번 인류를 전율케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리스도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ㅡ 비록 실패한 이들의 헛된 믿음이라는 비아냥을 받을지라도, 각 종교들은 과거 핍박받던 개창(改倉)시기를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 가치를 다시 드러낼 기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단, 기계가 인류처럼 종교를 창안하고 받들어 모시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