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멤버들이 다 준수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러려니 싶지만 〈Savage〉는 듣는 귀가 즐거운 노래라고 생각했다. 다양한 느낌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는데, 하나하나 밟아나가면서 듣는 재미라고 해야 하나. "Get me get me now" 부분을 듣다가 순간 비욘세의 〈Diva〉에 도도히 흐르는 I'm a-a- diva가 생각났지만, 이걸 "gimme gimme now"라든지 "김이 김이 나"로 바꾸고 치켜세운 인지를 까딱거리며 "Zu zu zu zu (쯧쯧쯧쯧)"이라고 내뱉는 소리를 듣는 순간 비욘세의 흑백 뮤직비디오 이미지는 흘러간 옛 노래마냥 삽시간에 증발해버렸다. 〈Next Level〉에서도 그랬지만 SM 출신 가수들의 노래에서 들리는 특유의 그 브릿지가 등장하는데 이건 익숙해도 왜 끌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 왜 자꾸 20년은 훨씬 넘은 유영진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자꾸 뇌리에 박히는 것인지 이것도 참 대단한 구석이다.


그런데 옛말에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했다. 세 명의 증언이 있으면 거짓으로 존재하던 호랑이도 실체로 그려지는 인간 세상이라는데, 이 걸그룹은 〈Black Mamba〉, 〈Next Level〉에 이어 〈Savage〉까지 세 번 연속으로 자신들의 세계관 ㅡ SM Culture Universe라고 SMCU라고 하더라... ㅡ 을 소개하고 있다. 이쯤 되니 애들 장난놀음같이 들리던 ae(아이)라든지, naevis(나이비스)라든지, Kwangya(광야)라든지 이런 개념이 충분히 사람들의 관심 혹은 호기심을 끌 만한 수준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런 '컨셉질'의 스케일은 과거 뮤직비디오 내에서 황당한 초능력을 과시하던 EXO의 그것을 아득히 넘어서는데, 아직 시작 단계일지라도 거대하고 일관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느낌이 팍 든다.


흥미롭게도 이 세계에서는 보통 일반적인 K-pop 가요에서 등장하지 않을 듯한 단어들이 가사에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환각(幻覺), 이간(離間)질, 재생력(再生力), algorithm이라든지. 심지어 요즘 10대들이 construct의 의미가 아닌 expel의 의미를 가진 구축(驅逐)이란 단어를 이해하기는 하나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20년전 스타크래프트(StarCraft) 게임을 할 때, 코흘리개 초등학생들도 cybernetics라든지 electromagnetic pulse(EMP)라든지 ensnare라든지 평소에는 쓰기도 쉽지 않은 단어들을 전혀 어려움 없이 썼던 것을 보면, 결국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플레이와 전략이지 유닛의 명칭이나 기술의 사상적 근원이 아니듯 노래에서 중요한 것은 가사에 쓰인 어휘의 수준이 아닌 비트와 멜로디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오히려 AESPA의 이런 '컨셉질'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노래들이 실상 비종교인이 종교 음악을 들을 때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무신론자들에게 종교 음악은 '컨셉질'의 최고봉인데, 이를테면 기독교 음악을 두고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천국(天國)에 대한 개념은 KOSMO와 다를 것이 무엇이며,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가 사망권세를 이겼음을 기리는 노래와 ae와의 SYNK를 방해하는 Black Mamba를 쳐부수겠다고 선포하는 것 사이에 어떤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는지? 게다가 이 종교 음악의 가사 역시 비종교인들에게는 난해하거나 다소 오글거리지 않는가? '눈먼자 다시보게 하소서 죽은자 거듭나게 하소서 생수의 강물로 넘쳐주소서'라는 가사와 'I'm going 광야로, game in 물리쳐 교묘한 이간질 And my æ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회심찬 네 trick'라는 가사 중 어떤 것이 더 현실에 비해 이질적일까? 얼마나 현실에서 덜 쓰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을까?


되짚어보자면 SM에서는 AESPA를 필두로 한 종교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기존에는 얼마나 호소력이 있는지, 전달력이 있는지, 대중성에 합치하는지, 음악 구성이 뛰어난지 이런 것에 대한 논의가 리뷰에 따라와야 했지만, naevis의 도움으로 신성한 종교적 가르침을 한꺼풀씩 드러내는 AESPA의 노래에서는 이 멜로디가 엄밀한지, 혹은 가사의 전달이 합리적인지 아닌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이 믿음에 합류하는 사람이 많느냐 적느냐만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 초반 단계에 '이 노래들 뭔가 좋다.'라는 평을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뭐라 설명하기 힘든 이 기묘한 가사와 멜로디, 눈이 즐거운 뮤직비디오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노래들'을 넘어서서 '이 사람들' 내지는 '이 세계관, 아니 종교관'이 뭔가 (이해는 못하더라도) 좋더라는 확장된 인상을 가지도록 강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멋 모르고 들어간 집회 장소에서 '왠지 끌린다!'는 감탄을 내뱉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신흥 종교의 성격을 그대로 닮지 않았는가! 다행(?)인 것은 AESPA를 필두로 한 SM의 신흥 종교는 미래지향적이고 흡인력이 있다는 점에서 사회 문제로 비화(飛火)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한편 신흥 종교도 결국 돈을 필요로 한다. 재미있게도 이 미니 앨범은 무려 세 개의 버전으로 출시되는데 (Hallucination Quest, SYNK DIVE, P.O.S.) 각 앨범마다 부수적으로 들어 있는 카드나 포스터가 다 제각각이라고 하니, AESPA의 열성 신도라면 '최소' 앨범은 세 개 구매할 것이 자명하다. 동일한 음원 묶음을 기반으로 여러 개의 '파생 상품'들을 제작하는 기이함이 지난 세대들에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놀랍게도 요즘 K-pop의 음반 발매량은 2016년부터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니 이런 전략이 요즘 세대에서 오히려 잘 먹힌다는 것이 입증된 것은 이미 수년 전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지금은 앨범이 발매되는 이벤트가 있을 때에나 큰 돈을 들여야 하지만, 언젠가는 AESPA가 꿈꾸던 KOSMO로 자유롭게 언제든지 SYNK하기 위해 월 구독료를 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가만 이거 주정헌금(獻金)과 너무 비슷한 원리 아닌가? 메타버스(metaverse)의 신흥 종교는 딴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었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