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투고를 마치고 포닥 관련 이메일을 해외 연구자들에게 싹 다 돌린 뒤에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찾지 못했다. 기존에 하던 일이 다 매듭지어진 마당에 실험을 더 진행하기도 애매했고, 그렇다고 새로운 주제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더더욱이나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학교에 9~10시까지 나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별 일이 없었다. 차라리 운동을 좀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나,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음에도 운동한다고 아침 늦게 실험실에 나오는 것은 박사과정 연구로 바쁠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될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졸린 눈 비비며 학교에 나와 아침 운동은 건너뛴 채 연구실에 나왔더랬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게 유익한 것은 없었다. 도대체 잉여롭게 연구실 자리에 앉아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게 요즘 내 고민이었다.


요동치는 이 내 마음에 적잖은 위안을 준 것이 바로 지난번부터 계속 읽고 있는 책인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s'. 신학에 대한 궁금증과 목마름을 조금 해소시켜 주는 단비같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지금 굳이 과학 공부만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지금까지 체력이, 시간이 안 되어서 못했던 공부들을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난 석달간 배웠던 골프도 즐거웠지만, 그런 거 말고 진짜 내가 해왔던 것들 중에서 미진하게 남겨두었던 것 말이다.


그래서 최근 스페인어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목표는 소박하지만 그래도 DELE A2. 예전 incial(초급)보다 낮은 단계의 어학 급수이지만, 처음 준비하는 DELE이고, 게다가 오랫동안 스페인어 공부를 이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단기간의 성과와 성취를 위해서 A2를 준비하기로 했다. 시험은 5월인데 1월부터 앞으로 넉달 정도 시험을 집중적으로 준비하려고 한다. 그런데 시험 준비가 별 게 있는 게 아니다. 그냥 학원 다니면서 문법을 정리하고 표현을 익히는 건데 아마도 다음달부터는 회화반도 들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DELE 시험은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가 다 있는데 말하기 수업은 함께 진행되지 않기 때문. 이걸 진작에 했어야 했는데, 학부 때에도 대학원 때에도 시간이 전혀 나지 않아서 이제야 한다. 솔직히 직장을 잡기 전에 B1 까지 따고 싶기는 하다. 그 정도면 스페인어권에 나가서 일하는 기회도 잡을 수 있을텐데 말이지.


그리고 이번주부터 컴퓨터활용능력 필기 책을 보고 있다.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한 친구의 제안에서 시작된 것인데, 엑셀과 엑세스가 시험 문제라길래 솔깃해서 교보문고에서 수험서를 찾아보니 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내용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나도 같은 날 시험을 쳐서 빠른 시일 내에 자격증을 따기로 했고, 목표는 2월 내에 필기와 실기를 모두 통과해서 1급 자격증을 따는 것이다. 사실 자격증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홀로 쌓아 온 엑셀과 액세스 활용 능력을 잊지 않고 유지시키고자 하는 바람에서 선뜻 이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특히 액세스... 난 이 프로그램이 참 좋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매일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것같아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하루하루가 매우 충실해졌다는 점이다. 요즘은 매 시간 치열하게 책을 읽고 공부하느라 바쁘다. 이런 기분은 한창 연구에 매진하던 박사과정 때 이후로 오랜만이다. 한 가지 문제라면 요즘 하는 공부에 내 전공과 관련된 건 도대체 하나도 없다는 것. 그래서 신학 교리사 책을 독파하면 그때부터는 기초적(fundamental)인 고분자 화학/물리책을 복습하려고 한다. 그 정도면 적어도 '제 할일을 등지고 딴짓하는 죄책감'은 덜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렴 어떤가. 지금 나는 말라 비틀어져가는 듯한 목마름에서 벗어나 기쁘고 즐겁게 약동하고 있다. 이제야 뭔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역시 사람에게는 목적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