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인 신성고등학교에서 이번 겨울방학에 한번 더 특별강의를 지난주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3일간 진행하였다. 지난 여름방학 때에는 과학철학에 대한 강의 ― 자세한 내용은 http://fluorf.net/xe/72328 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를 진행했는데, 솔직하게 토로하자면 그 강의를 온전하게 진행하기 위해 내가 들여야 했던 수고가 만만치 않았다.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이라든지 패러다임(paradigm)과 같은 어휘와 개념은 고등학생들에게 생소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강의를 위해 사전에 칼 포퍼의 주장과 토머스 쿤의 저서를 읽으며 나 나름대로 먼저 해당 내용들을 소화해야만 했는데 그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력한 결과, 과학철학에 관한 아주 기초적인 이야기들을 고등학생 친구들에게 해 주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아이들이 '잘 이해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확신에 찬 'Yes'를 내놓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번 겨울방학의 특강 요청 문자를 받아들었을 때, 나는 반드시 새로운 주제로서 내가 좀더 친숙하게 여기는, 아이들에게는 덜 어려운, 그래도 과학적인 이야기와 과학 외적인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는 것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과 선택한 주제가 '음악과 물리학'이었다.  이 선택에는 2년 전에 미국 재료학회 박람회장에서 구매한 책 'Physics of the Piano'도 한 몫 단단히 기여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으면서 음악과 음향학을 잘 이해하려면 물리학적인 지식이 결코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것을 한창 자라나는(?) 고등학생들에게 알려주면 딱 좋겠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도 재즈를 오랫동안 들어왔고, 또 음악사와 화성 이론 공부도 조금은 깔짝(?)댄 적이 있었으므로 물리학만 줄창 얘기하기보다는 음악 관련된 내용들도 충분히 폭넓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지난 주말 이틀간을 꼬박 바쳐서 거의 100여장에 달하는 파워포인트 강의 자료를 만들었고, 유튜브를 누비며 도움이 될만한 여러 영상들을 준비했다. 실험을 하는 중간중간 자료를 수정하고 애니메이션 효과도 넣고 그랬다. 거창하게 뽑은 강의 소개글은 다음과 같았다.


"본 강좌에서는 파동의 물리학을 통해 음악을 연주하는 데 쓰이는 도구인 악기(樂器)가 어떻게 소리를 내고 그 특징이 무엇인지를 고찰하며, 나아가 악기 소리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음악(音樂)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기초적인 수준에서의 음계(音階)와 화음(和音) 발전의 역사를 다룬다."


그리고 3일간 이어진 강의의 일일 목표들은 다음과 같았다.

  1. 악기가 소리를 내는 원리를 물리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다양한 악기를 호른보스텔-작스(Hornbostel-Sachs) 분류법으로 분류할 수 있다.
  2. 대표적인 현명악기(絃鳴樂器)인 피아노가 어떠한 방식으로 소리를 내는 것인지, 또 왜 그러한 형태와 구조를 가진 것인지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3. 파동의 물리학을 근거로 하여 12음계의 발전 역사와 평균율(平均律), 협화음정(協和音程)과 불협화음정(不協和音程)의 차이점을 음악 역사의 발전과 함께 이해할 수 있다.

강의를 모두 마치고 전체 강의를 조직한 선생님으로부터 칭찬 비스무레한 문자를 받았다. 아이들이 너무 좋은 강의였다고 매우 좋아한다며 다음에도 또 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약간 과장과 인사치레의 말들이 섞여있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듣기 좋은 말이다. 총평을 내리자면 강의에서 목표로 삼았던 부분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전달된 것 같았다. 물리학과 아주 연관이 깊었던 강의는 둘째날에는 수식이 많이 등장해서 (특히 문과) 아이들이 매우 힘들어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강의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 같다. 그런데, 하루에 강의가 2번 있었는데, 확실히 두번째 시간 강의가 첫번째 시간 강의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전달력이 좋았다. 다시 말하자면, 첫번째 시간의 강의는 일종의 연습 혹은 시행착오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첫 시간 강의였던 고 3 학생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지난 여름방학 강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가장 흥미롭게 들었던 수업은 마지막날 수업이었다. 피타고라스 음률을 따라 반음계(chromatic scale)를 어떻게 얻는지, 불협화음정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데 피아노와 기타를 쳐 본 아이들은 상당히 흥미로워하는 눈치였다. 맨 마지막에 불협화음정을 사용한 대표적인 곡 영상으로 김연아의 2009년 사대륙 선수권대회 쇼트 프로그램인 'Danse Macabre'와 아이돌 그룹인 f(x)의 '첫사랑니'를 틀어줬는데 모두들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하는 눈치여서 나도 덩달아 말이 많아졌다. 박사가 와서 강의를 하는데 난데없이 k-pop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 주말이 되면 피아노를 꽤 자주 쳤다. 그리고 미술 과제나 다른 글쓰기 과제를 할 때 클래식 음악 CD를 틀어놓곤 했는데 ― 특히 하프시코드로 연주한 바흐의 여섯 개의 작은 전주곡 ― 강의를 위한 보충 자료들을 유튜브를 통해 틀어주는 시간마다 그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것 같았다. 뭐 '음악과 물리학'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 강의가 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줬다든지 혹은 인생에 큰 나침반이 되었다든지 하는 그런 거창한 생각은 일절 하지 않는다. 다만, 기숙사에 늘 박혀 살면서 입시공부만을 강요받는 이 똑똑한 상위권 학생들이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내켜 좋아하는 것들을 잃지 않고 취미를 발견하며 사는 고등학생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런 점에서 입시를 위한 공부와 문제풀이에서 좀 벗어난 이런 '주변부의' 이야기들도 귀담아 듣고 즐길 줄 아는 친구들로 성장했으면 참 좋겠다. 수능을 본 지 만 11년도 훨씬 지난 지금 내게 고등학생 때 알게 된 소중한 인생 자산들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재즈와 피아노, 스페인어, 그리고 보드게임을 떠올릴 것 같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것들 아니던가.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