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는 오늘! 해외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것은 이번이 두번째인 듯 싶다. 하지만 가족과 멀리 떨어져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것은 이번이 첫번째인 듯 싶다.


주중 토요일이 늦잠을 잘 수 있는 유일한 날이라서 보통 늦게 일어나지만 오늘은 생각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저번 '스몰 김장' 때 해 놓았던 배추 김치와 시금치 나물, 그리고 간단하게 계란 후라이를 만들어서 전날 지어놓은 밥과 함께 아침 밥을 뚝딱 해치웠다. 설거지를 하고 홈페이지 글을 작성하고 간단하게 점심을 곧 먹은 뒤 학교로 출발했다.


지난 번에 성공한 정제 과정을 이번 주 동안 되풀이했는데 번번히 실패해서 계속 골머리를 앓아오던 차, 바로 어제 실패의 원인이 될만한 부분을 간파했고, 그래서 오늘 재실험에 돌입했고, 결국 성공했다. 원흉은 바로 다이에틸 이써(diethyl ether)! 추출을 위해 이 용매를 사용하면 굉장히 깔끔하게 생성물을 분리해낼 수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발목을 잡아 최종 정제 과정에서 침전물(precipitate)이 안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예 이써를 이용한 추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다음 과정을 진행했는데 이써가 없으니 침전이 매우 효과적으로 진행되었다. 기분 좋게 크리스마스 이브의 실험을 시간 안에 종료할 수 있었다.


실험이 끝나자마자 경전철을 타고 교회로 향했다. 본디 교회 일과의 시작은 밤이며 그래서 저녁 기도인 만과(晩課)가 하루 예배 일정의 처음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대한 성찬례는 바로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열리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Gethsemane 교회에 출석한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운집한 것을 보았다. 중창단들은 좀 더 일찍 모여서 '앤섬(anthem)'이라고도 불리는 봉헌 시간에 하는 합창을 연습했다. 이날 합창곡은 팔레스트리나(Palestrina)의 '오늘 그리스도가 나시다(Hodie Christus natus est)'였는데 굉장히 복잡한 폴리포니(polyphony)여서 박자를 맞추는 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오늘 크리스마스 예배는 굉장히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설교 대신 교인들과 신부님이 함께 하는 단막극 ― 교회 영어로 성극이라고도 한다. ― 이 진행되었으며 굉장히 유쾌하고도 따뜻하게 진행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찬의 전례 중 성찬 기도와 주기도문을 굉장히 겨울 분위기 물씬 풍기는 노래로 진행하였다. 미국 성공회라서 이런 시도가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분위기가 참 포근했다.


감사성찬례가 모두 끝나고 나는 차를 타고 Kristine의 집으로 향했다. 교회 중창단으로 봉사하는 Kristine이 나, 그리도 다른 중창단원인 Lynette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20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에 있는 그녀의 집은 그야말로 내가 늘 상상해 왔던 미국인의 집 그 자체였다. 온갖 공작 및 작업도구가 가득한 차고, 벽난로와 카펫이 있는 널따란 거실, 그 한구석에 크게 서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벽난로에 걸린 산타 양말들... 우리는 거기서 와인과 함께 덴마크식 샌드위치를 먹었고, 후식으로 과일 수프(노르웨이어로 fruktsuppe)와 커피를 즐겼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아마도 Kristine은 스칸디나비아계 미국인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Kristine은 내가 참 멋진 노래 실력을 가졌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내가 어떻게 해서 노래를 그렇게 부르는 지 굉장히 궁금해 했다. (내가 대중 가요 노래 실력은 뒤떨어져도 중창이나 합창을 위한 노래 실력은 그런 대로 봐줄 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G5 이상의 높은 음을 자유롭게 내지 못하지만, 음역이 넓고 발성을 깊게 할 수 있다는...? 하하.)


흥미롭게도 Kristine의 남편인 Chris는 그리스계 미국인으로 동방 정교회 교인이었으며 미네소타 대학에서 음악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신데다가 비잔틴 전례의 음악에 대해 연구하신 분이었다. [성공회 교인과 정교회 교인이 공존할 수 있는 이런 다양성을 보라! 물론 그 식사자리에는 그리스계 미국인, 스칸디나비아계 미국인, 켄터키(Kentucky)의 루빌(Louisville)에서 온 흑인 여성,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온 아시안 남성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다양성의 극치이긴 했지만.] 그는 내가 동방 정교회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식사 도중 그가 작곡한 연주곡들이 CD를 통해 흘러나왔는데, 비잔틴 음계가 가지는 그 묘한 분위기가 참 아름다웠다. 음악 전공이시다보니 가끔씩 음악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히 그가 작곡한 몇 곡들이 바르톡(Bartok)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에 나도 예전 피아노를 배울 때 바르톡의 미크로코스모스(Mikrokosmos) 연습곡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어느덧 시간이 다 되어 우리는 즐거운 성탄전야 식사자리를 끝냈고, Kristine은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나는 연신 감사를 표하며 'Merry Christmas!'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굉장히 흥미로운 크리스마스 이브 아닌가. 오늘 하루의 일과를 돌이켜보니 내가 참 미국 생활에 매우 잘 적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보낸 내 30년의 습성이 큰 문화적 충격 없이 부드럽게 전이(轉移)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주님의 은총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성탄의 밤, 나는 무척 기쁘다. 오늘 하루의 시간을 채웠던 그 모든 요소들을 떠올려보며 그저 감사할 뿐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