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곳에서 일하는 포닥 대부분은 기혼자인데, 당장 내 자리가 있는 연구실을 사용하는 다섯 명의 포닥 중 나 빼고는 전부 한 가정의 가장들이다. 그래서 하루는 "어, 이것 봐. 여기 나만 싱글이고 다 결혼했어." 라고 했더니 내 뒤편에 앉은 포닥 왈: "싱글? 그거 좋은 (good) 거야."

2. 이런저런 짤막하게 얘기하다가 "그럼 여자친구 있는 경우가 더 좋았나, 아내가 있는 경우가 더 좋았나?"라고 묻자 그는 기지를 발휘하여 현답을 내놓았다:  "사실 둘 다 있는 게 좋지."

3. 옆에서 잠자코 그 말을 듣던 다른 포닥이 퇴근 준비를 하면서 내게 물었다: "성 바울로(St. Paul)가 한 말이 있잖아?" 그래서 내가 되물었다. "아, 그 고린토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얘기하는 거야?".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응, 정확히 어떤 서신인지는 기억 안 나는데, 그가 옳아." 참고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다 나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은총의 선물이 각각 다르므로 이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삽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과 과부들에게는 나처럼 그대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4. 다른 포닥 집에 초대를 받아서 저녁식사를 두 부부와 함께 한 적이 있었는데, 페루 포닥이 내게 미국에 와서 겪은 가장 큰 문화 충격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사실 큰 문화 충격이랄 건 없었다고 얘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굉장히 다양한 미국 가정의 형태'에 대해 마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아직도 '친부 + 친모 + 친형제자매'로 구성된, 한핏줄을 기반으로 한 가정에 대한 집착이 굉장한데 비해, 여기에서는 계부와 계모, 이복형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정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는데다가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지역인만큼 아버지나 어머니가 둘인 가정도 더러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무슨 숨길 일이나 사회적으로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현지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차차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듣던 미국인 포닥 왈: "미국인 가정 형태가 스펙트럼이 꽤 넓죠. 다양성을 존중해줘야한다고 생각해요."

5. 그러다가 페루 포닥 부인이 한국에도 싱글맘이 있지 않냐는 질문을 해서 이야기 주제가 싱글맘으로 넘어갔는데 그 미국인 포닥 부인 왈: "사실 한부모 가정 자녀들이 불이익을 경험하는 건 보살피는 사람의 부재 때문이죠. 한 사람이 일하는데 아이까지 챙기는 건 너무 벅차잖아요. 그런데 그게 한부모 가정의 문제만은 아닌게, 맞벌이하는 일반 부부들 중에도 한부모 가정만큼이나 아이한테 신경 못 써주는 경우가 많아요. 결국 그 아이들도 같은 불이익을 경험하는 거죠. 어떤 면에서는 싱글맘이나 레즈비언 커플의 아이들이 더 보살핌을 많이 받을 수도 있다니까요." 이 얘기를 듣는데, 한국에서 소위 "정상적인 가정"에서 생산(?)된 막장 자녀들의 추태가 떠올랐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니 참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이런 기회들 하나하나가 참 소중하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