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로부터 12번째 밤이 되는 날로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 저녁이 바로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이 된다. 기독교에서는 주현절이 시작되는 저녁에 교회와 집안에 있던 모든 크리스마스 장식을 떼어낸다고 하는데, 사실상 성탄 주간의 마지막 날인 셈이다. 내가 출석하는 Gethsemane Episcopal Church에서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멧돼지 머리 축제 (Boar's head feast)를 기획했다. 아니 웬 생뚱맞은 멧돼지 머리? 정작 이 교회 사람들도 이 축제의 연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듯 했다. 그래서 재빨리 위키백과를 찾아보았고 몇 가지 설명을 보고 나서 '아!' 하고 무릎을 탁 쳤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원래 멧돼지 머리 축제는 과거 유럽의 이교도 문화였다고 한다. 멧돼지는 야수들의 우두머리와 같은 존재였고, 따라서 멧돼지를 사냥한 뒤 머리를 베어 상에 올리는 것은 일종의 인간을 해치려 하는 자연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의미라고 한다. 이것이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약간 의미가 변한 것인데, 여기서 멧돼지는 일종의 악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멧돼지의 머리를 상에 올리는 것은 성탄으로 이 세상에 온 아기 예수가 죄악에 대해 영원한 승리를 선포하는 의식이 된 것이다. (일종의 종교 융합 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의식은 중세 시대 이후 영국에서 완전히 크리스마스 축제로 자리잡게 되는데, 전설처럼 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퀸스 칼리지(Queen's College)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으며 새벽 예배에 참석하려고 길을 가던 한 학자가 가던 도중 성난 멧돼지를 만났고, 생명에 위협을 느낀 학자는 급한 대로 손에 있던 책을 내던졌는데 책에 멧돼지가 그걸 덥석 물었다가 책에 있던 금속 틀 때문에 질식당해 그만 죽고 말았다. 위기에서 구원을 받은 학자는 이를 감사히 여기며 그날 멧돼지 머리를 베어 장식한 뒤 식탁에 올려두고 큰 기쁨을 주신 주님을 찬양했다고 한다.


그 이후 영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이와 같은 축제에서 멧돼지 머리 캐롤 (Boar's Head Carol) 을 부르는 관습이 생겨났는데 이 노래의 1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기울임체는 라틴어)


The boar's head in hand bear I, bedeck'd with bays and rosemary.

And I pray you, my masters, be merry quot estis in convivio

Caput apri defero reddes laudes Domino


뜻은 대강 '나는 푸성귀로 장식된 멧돼지 머리를 손에 들고 가져갑니다. 그리고 나의 주님께 기도하길 이 축제에 모인 이들에게 기쁨이 있기를! 나는 멧돼지 머리를 가져가며 주님께 찬송을 드립니다.' 정도가 되겠다. 오늘 나는 이 노래를 부르며 큰 쟁반에 담긴 가짜 멧돼지 머리를 부엌에서 식장으로 천천히 가져 왔다.


한국에서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영국풍의 옛 축제인지라 무슨 문화체험하듯이 축제를 보냈다. 이날 풍습으로는 무조건 집에서 만든 음식들을 가져오는 거라고 했는데, 어떤 가정이 노르웨이식 얇은 빵인 레프세(lefse)를 설탕과 함께 돌돌 말아서 내놓았는데 굉장히 달달한 게 맛있어서 다음에 집에서 한 번 만들어보면 좋겠다 싶었다. 참고로 미네소타는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이주해 온 북유럽인들의 후손들이 많이 살아서 북유럽 전통 음식 혹은 관습이 몇 가지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레프세처럼 말이다.


아무튼 굉장히 유쾌한 경험이었다. 조만간 사순절 이전의 마디그라(Mardi Gras)도 계획하는 것 같던데, 굉장히 궁금해진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