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은 평일이지만 KIST 개원을 기념하는 휴무일로 지정되었기에 특별한 휴일이다. 그래서 나는 어젯밤에 늦은 밤 시외버스를 타고 안양에 올라왔고 ― 승객이 2명뿐인지라 휴게소도 들르지 않고 1시간 45분만에 익산왕궁정류소에서 서초남부터미널에 도착했다. ― 자정 쯤에 도착한 안양집에서 하룻밤 푹 잤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있는데 일을 일찍 마친 동생이 집에 찾아와 점심을 함께 했고, 백화점에서 짤막한 쇼핑을 한 뒤 우리 모든 가족은 시흥에 있는 동생 집으로 건너갔다.


동생 집에 건너가서 처음 한 일은 플라스틱으로 된 유아용 미끄럼틀을 조립하는 것. 원래 이것은 아파트 단지 내에 쓰레기로 버려져 있던 것인데, 부모님이 집으로 가져오신 것이었다. 조카가 걸어다니기도 전에 수거해 오신 것이니, 당시로서는 먼 훗날 이용될 수 있을 것을 내다보시고 쓰레기 재활용(?)을 몸소 실천하신 것. 완성품이 어떻게 생긴지 기억이 가물가물한어른 넷이서 낑낑대며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면서 결국 제법 그럴 듯한 미끄럼틀 놀이기구 완성!


조카는 처음에는 신기한듯 기웃거리다가 우리가 계단쪽으로 유도해서 그쪽으로 어찌어찌 걸어갔는데,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게 굉장히 험난해 보였다. 그래서 어머니와 내가 양팔을 잡아주고 겨우겨우 미끄럼틀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우리는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기 전에 앉아야 한다는 것과 미끄럼틀 양 난간을 잡고 내려와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조카는 이내 자리에 앉아 머뭇거리더니 어른들이 가리키는대로 양손을 난간에 대고 있다가 이내 움직였는데 쓩~ 하고 내려가는 것이 엄청 재미있었나보다. 마구마구 웃으면서 다시 계단쪽으로 돌아간 조카. 체력이 넘쳐나는 수퍼 베이비 우리 조카는 한두번도 아니라 정말 스무번 이상 계속 미끄럼틀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미끄럼틀 놀이가 반복될수록 이 아기가 깨우치는 것이 분명 있어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선 계단을 올라갈 때 양 난간을 잡고 올라가기엔 아직 힘에 부쳤는지 굉장히 어려워하고 있었는데 내가 앞에 있는 계단을 양손으로 짚어 기어가듯 올라갈 수 있다는 시늉을 보여줬더니 그대로 따라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옆에서 '영차 영차' 구호를 넣어주니 자기 스스로 '흐이짜~ 흐이짜~' 하는 것이 너무 웃겼다. 그런데 정말 너댓번 계단을 오르다보니 어른들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계단을 오르는 것이 아닌가. 오르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니 자기 나름대로 효율적으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이렇게 계단을 다 올라가면 일어섰다가 미끄럼틀 내려오기 직전 위치까지 조금 걸어간 뒤 거기서 앉고 나서 쓩~ 하고 내려왔다. 그런데 이 아기가 이런 행동이 불필요함을 알았던지 계단을 오르고 나서는 굳이 일어나지 않고 앉은 채 발을 앞쪽으로 돌려서 손 짚고 움직여 미끄럼틀 내려오기 직전 위치로 이동한 뒤 하강할 준비를 마치는 것인가. 미끄럼틀을 빠르게 즐기기 위해 행동을 가장 효율적인 형태로 재정비한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게다가 미끄럼틀을 몇 번 타고 내려오니 자기가 다리를 11자로 쭉 펴지 않고 약간 굽히면 틀을 타고 내려오는 속도가 느려진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마찰을 이용해서 하강 속도를 제어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미끄럼틀에서 바닥으로 내려올 때 쿵하고 엉덩방아를 찧지 않게 되었고 너무 급하게 내려오다가 뒤통수를 미끄럼틀에 부딪히지 않게 되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아기가 갑자기 호기심을 내보이며 미끄럼틀을 기어 도로 거꾸로 올라가려고 했다는 것인데 ― 사실 어렸을 때는 이렇게 틀 위로 빠르게 걸어 거꾸로 올라가곤 했었다. ― 처음에 어머니와 동생은 이런 행동이 위험하다고 제지했지만, 나중에는 이것을 끊임없이 시도하기에 '네가 해볼 테면 해봐라'라는 심산으로 가만히 놔 두었다. 몇 번 실패해서 엎드린채로 다시 미끄럼틀에서 쓩~ 하고 내려오는데 그것도 나름 아기한테는 재미있었던 모양. 그런데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미끄럼틀 난간을 잡는 시늉을 하며 조카가 거꾸로 올라가게 유도했고 뒤에서 힘을 조금 보태주었다. 그랬더니 조카는 드디어 꿈을 이루어 미끄럼틀을 거슬러 기어 올라갈 수 있었고 그 보상으로 다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오케이. 그런데 나중에는 두어번 실패 끝에 어른들의 약간의 도움을 힘입어 다시 미끄럼틀을 거슬러 올라가더니 아까 동생에게 온 문자에 따르면 기어이 자기 스스로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는 데 성공했고 계단을 타고 내려왔단다. 오, 세상에.


오늘 조카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 반복학습이란 게 이렇게 대단하구나. 그리고 인간의 반복학습은 단순한 반복 행동에 그치지 않고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는구나. 그리고 마지막 중요한 한 가지는, 인간의 무모한 호기심과 같은 것이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면서 기존의 학습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구나. 이것이야말로 인류 지식과 과학의 발전과 진보의 한 단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했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