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설 연휴(蓮休)를 아래의 몇 도막의 짧은 글들로 정리할 수 있다:


一。

일요일에 시흥 집에 올라와서 그 다음주 일요일에 내려가는 만 7일의 일정은 KIST 전북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래 몇 안 되는 장기간의 연휴 일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동네 저 동네 쏘다니고 싶었지만, 부모님과의 재회 후 맞이한 급속한 기온의 하강과 더불어 오미크론발 코로나19 확진자의 폭발적 증가세가 내 운신의 폭을 좁히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번 설 연휴에는 오랜만에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二。

수요일에 만난 종원이와 기룡이는 거의 3년만에 보는 듯했다. 서로 사는 지역의 중간 어드메쯤에 해당하는 합정역에서 만났는데, 합정역이 그렇게 드넓게 확장되어있는 줄 미처 몰랐다. 설 연휴 마지막날이었지만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은 채 영업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전전날부터 장염 증상으로 인해 고생한 종원이는 조금 부드러운 음식을 찾으려다가 결국 포기했다. 우리는 오랜만에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 최근에 만났던 인간 군상에 대한 유쾌한 에피소드, 그리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열띤 이야기를 나눴다. 근래 기룡이가 선거관리위원회로 일자리를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거 이벤트가 즐비한 이번 2022년을 부디 무리 없이 잘 보내라고 독려해 주었다.


三。

나의 5촌 조카에 해당하는 지후를 오랜만에 보았다. 삼촌을 보자마자 넙죽 세배를 하며 살뜰하게 세뱃돈을 주머니에 간수하는 3촌 조카 희준이는 벌써 말 잘하는 여섯 살이 되어 비행기와 공룡, 로켓에 대한 일장연설을 쉼 없이 잇곤 하는데, 아직 걷지도 못하는 5촌 조카 지후는 제 당숙아재의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지 멀뚱멀뚱히 나를 바라보곤 했다. 자기 아빠를 닮아 중량과 부피가 보통이 아닌 이 아기가 제 딴에는 유일한 동생이라고 여기는 3촌 조카 희준이는 아기를 위해 열심히 노래도 불러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했는데, 어쩌면 아이들의 사회성 발달과 고른 인성 함양을 위해서는 자식이 하나 있는 것보단 둘이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와는 별개로 임신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이종사촌 은지 내외가 임신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어 무척 감사했다.


四。

소위 영혼을 끌어모아 광명에 아파트 하나를 얻은 용석이의 집들이를 위해 아주 오랜만에 친구들이 다 모였다. 애 둘을 둔 아빠인 휘상이는 오랫동안 있지 못하고 이내 작별을 고했지만, 애초에 하룻밤을 묵기로 작정하고 철산동의 이 집을 찾은 나와 성림이, 지열이는 도착하자마자 옷부터 갈아입고 먹거리와 마실거리를 거나하게 펼쳐놓았다. 집들이 선물로 구매한 공기청정기는 오랜만에 집을 점유한 다섯 장정들이 마시고 내뱉는 공기를 감시하느라 애 좀 썼을 테다. 우리는 단톡방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게임, 모노폴리 클래식 (K-청약 확장판)을 진행했는데 가볍게 시작한 게임이 장장 4시간여나 이어질 줄은 몰랐다. '독점'이 있어야먄 건물을 세울 수 있고, 그리고 그 독점 유지가 무척이나 중요한 이 게임에서 한국적인 요소로서 주택 청약이라는 제도를 결합시키자 꽤나 흥미로운 게임진행이 이뤄질 수 있었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모든 토지는 어떤 이들의 소유가 되고, 또 건설할 수 있는 주택의 공급이 달리게 됨에 따라 청약제도는 유명무실한 무엇인가가 되었다. 나는 전라북도의 세 도시 ㅡ 전주, 익산, 군산 ㅡ 를 독점한 뒤 아파트와 주택을 아주 즐비하게 두고 꽤 많은 임대료를 거둬들이며 재미를 쏠쏠하게 보았지만,  이내 친구들의 정책 견제로 인해 전주 땅을 잃고, 익산에서의 권리를 모두 박탈당해야 했다. 그리고나서 남의 건물이 된 전주, 제주, 대전에서 높은 임대료를 연거푸 부과받았는데, 모든 건물을 팔고 땅을 저당잡혀도 도저히 임대료를 낼 수 없는바 게임에서 가장 첫 순서로 파산하고 말았다. 모두들 입을 모아 나더러 투자업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증언하고 있었다. 극후반부에 급격히 기운 게임은 지열이의 압승으로 끝났는데, 이는 마치 한번 생겨난 불균형이 끝끝내 모든 부의 선택적 집중을 야기한다는 어떤 보편적 진리를 상기시키는 것 같아 마음 한 편이 씁쓸했다. 게임이 정리되고 고스톱과 섰다를 했는데 여기서도 나는 여지없이 돈을 잃어 넷 중 유일하게 돈을 잃은 사람으로 조롱받았다. 역시 난 연구나 해야겠다.


五。

익산으로 내려오기 전, 서울대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한 선배의 예식을 보러 갔다. 오미크론 확산과 익산행 버스 일정을 맞추기 위해 신랑 눈도장만 찍고 축의금만 전달하고 예식의 극초반부만 보고 나왔는데, 하객이 너무 많이 들어차 있어 깜짝 놀랐다. 예식장에서는 나를 보고 인사하는 이가 있었는데 마스크를 쓴 얼굴로는 익숙하지 않아 목례를 하고 지나갔는데, 나중에 방명록에서 보니 화학부 동기였다. 아마 윤재 결혼했을 때 한 번 본 게 마지막이었는데,  그 이후로 2-3년간 그 어떠한 대화의 조각도 서로에게 던져본 일이 없었으니 그의 얼굴을 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는 내게 요즘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고, 나는 여전히 전처럼 KIST 전북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외롭겠다'는 지극히 상투적이면서도 빈껍데기에 불과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평소같으면 '외로웠으면 진작 결혼했겠지 뭐~'라며 너스레를 떨었겠지만, 전날 친구들과 밤새 고스톱과 섰다를 하며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할 때까지 놀다 잠든지라 영육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신랑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물어보았다. 서로의 삶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걸 알았던 나는 그대로 식장에 들어가 신랑에게 눈도장을 찍고 학교를 빠져나오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 나도 외로움을 느껴봤으면 좋겠네, 그 말에 공감이란 걸 좀 해 보게 말이다.


六。

어머니가 중국사극에 빠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아침 식사 시간에 방영하던 드라마 '사마의2: 최후의 승자'는 내 눈을 사로잡기 충분한 사극이었다. 주연의 연기실력도 일품이지만, 고대 중국을 세련되게 옮겨놓은 듯한 의복과 건축물이 눈길을 끌었고, 무엇보다도 삼국지 관련 인물 중 통상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왔던 사마의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다니, 그 방식이 파격이자 신선함 그 자체였다. 일반적으로 삼국지 이야기는 평면적인 선과 악의 캐릭터들이 시종일관 자신들의 야망을 좇아 대결하는 것으로 그려지곤 했는데, 이 드라마에는 절대적인 선악의 구분이 명백한 평면적인 성품의 캐릭터는 없었다. 사실 삼국지 이야기의 가장 큰 반전은 그렇게도 애를 써왔던 조씨도, 유씨도, 손씨도 아닌 바로 이 사마씨가 대륙통일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점이었는데, 어찌보면 이제서야 제대로 삼국지 이야기의 결말을 장식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사극의 수준이 이 정도로 발전한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보다가 미친듯이 일본 고에이社의 전략게임 '삼국지5'가 하고 싶어졌고, 혹시 모를 업무를 위해 가져온 노트북에 이를 설치해서 집에서 쉬는 시간에는 열심히 했다. 어제까지 결과에 따르면 내가 플레이한 장노가 손권과 현재 천하를 양분하고 있다.


七。

벼르고 벼르던 도포를 사러 종로에 있는 주단집에 드디어 갔다. 어머니와 함께 여러 옷감 색깔을 보고 어떤 조합이 좋을지 논의하다가 일단은 흰색 도포를 사고 그 위에 붉은 답호를 사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거 완전 일장기 스타일 아니냐며 농담을 했고, 곧이어 주인 아주머니가 줄자를 들고 와서 치수를 재시는데... 그럼 몇 학년이야? 네? 학생 몇 학년이냐구. 아.. 저요? 음.. 저 3학년 7반이요. 어머 어머 어머.. 당신께서는 웬 학생이 공연이나 이런 걸 하려고 한복을 맞추는 줄로 아셨다고 한다. 어이쿠, 그러면 장가가야겠네? 나는 머쓱한 눈웃음을 치며 주단집을 나왔다. 어머니 왈, 너도 네 아빠를 닮았느지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얘기를 듣는구나? 다음에 다시 한 번 들르게 되면 중치막이나 창의라도 하나 더 사볼까 싶다.


八。

나는 이번 설 연휴를 기념하기 위해 한산에서 소곡주를 사 갔고, 동생은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지역 방식으로 만드는 브랜디를 사 왔는데 이 브랜디가 아주 맛있어서 나를 감동시켰다. 내가 소곡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알코올의 불쾌함 없이 달짝지근하기 때문인데, 브랜디는 그런 모습을 퍽 닮은 포도주로 인식되었다.


九。

입춘(立春)을 맞아 개최된 베이징 올림픽의 개막식을 쥐포를 뜯으며, 그리고 이 브랜디를 마시며 즐겼는데 꽤나 감상적이고도 유쾌한 시간이었다. 해설위원이었던 송승환의 말대로 일본은 늙어가고, 중국은 젊어져간다는, 그래서 중국은 2008년보다는 더 여유를 가진 채 글로벌한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남부럽지 않을 수준을 갖추었을지라도 여전히 그 하드웨어를 통해 구현할 중국의 가치와 문화 상품은 빈약하고 부재하다는 데 나는 용석이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중국이 그 수준을 달성하기 전에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뭔가 잘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무척 다행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ㅡ 지금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것을 세계인들에게 선보일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기에.


十。

대선이 얼마 남기지 않고 열린 후보 토론회. 재생 에너지를 둘러싼 촌극을 지켜보며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과학자적 양심상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