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기사를 읽는데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쿵쾅거린 것이 민망함을 감추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대통령과 관련된 추문(醜聞)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데 이것이 뜬소문이 아니라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그 내용 자체가 너무나도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대통령은 4년 전 내가 표를 행사해서 당선이 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일말의 책임감을 가지고 이 사태를 주시하며 이 글을 쓴다.


연초 정운호와 관련된 비리 의혹이 제기되면서 실세(實勢)들의 비리로 인해 박근혜 정부의 권력 누수가 발생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우병우 민정수석과 관련된 비리로 번졌으며 급기야 최순실이라는 실세 중 실세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최순실이라는 사람과 관련된 언론 보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권력에 빌붙는 사람으로서의 실세가 아니라 대통령을 발 아래 둔 사람으로서의 실세라는 것, 그리고 두번째는 ― 이게 더 놀라운데 ―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및 재계가 굳이 약점 잡힌 것 같지도 않아보이는데 알아서 머리를 조아리며 순복(順服)한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있었던 역대 정권 말기의 친인척 비리와 사뭇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대통령이 나라를 홀로 경영하는 사람은 아니며, 대한민국의 정치 권력 구조상 실세는 존재할 수밖에 없기에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비교적 제왕적 대통령주의를 바탕으로 한 현 대한민국 헌법 체제 하에서는 맞는 말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역대 정권에서 친인척을 비롯한 실세에 관련된 비리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는 역사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번에 등장한 실세는 차원이 다른 실세이다. 국가 권력의 일부를 사익(私益)을 위해 오용(誤用) 및 남용(濫用)한 것과 국가 권력의 정점을 사익을 위해 사용(使用)한 것에는 준엄한 차이가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고 할 수 있겠다.


현재 퍼져나가는 의혹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말 그대로 대통령을 조종하여 자신의 이권을 모두 챙기면서 대리 통치를 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민주공화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봉건 시대 수렴청정도 비록 발을 드리웠을지언정 흑막 뒤에서 은밀히 일을 꾸미는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국가의 기밀로 여겨지는 문서들을 사적으로 확보하여 검토하고 수정하는 행위는 엄연히 불법이며 또 만에 하나 가능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라고 쓰지만 가능성은 0 %에 수렴한다고 생각하지만) 매우 제한적으로 및 공개적으로 이뤄저야 할 사안일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의혹대로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최순실 씨의 손에서 처리가 되었던 것이라면, 앞으로 이 나라 국민들은 정부의 대소사 처리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으며 또 어떻게 그 결과에 대해 긍정할 수 있겠는가?


(참고로 윗 문단의 앞 두 문장은 가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그 이후의 것은 대통령의 대국민사과 회견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번 사건은 박근혜라는 개인에 대해 신뢰를 가졌던 많은 보수층 및 새누리당 지지자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나는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라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굉장히 유능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2012년 총선 직전 큰 위기 상황에 봉착했던 한나라당에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당 대표색을 빨간색으로 (당시로선) 아주 파격적으로 바꾸는 것도 모자라 진보 측에서 다룰 만한 어젠다(agenda)들까지도 끌어 들이며 과반(過半)이라는 예상 밖 선전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 그녀가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로 인한 후폭풍이 불어닥쳤던 2004년, 한나라당을 잘 경영했던 것 역시 그와 같은 평가에 일조한 것이 사실이다. 실무 능력이 뛰어난 것이 대통령으로서의 직무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 당장 직전 대통령이 CEO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이었지만 대통령으로서 잘했다고 보기엔 미흡했다. ―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고, 나는 노무현의 후광을 등에 업은 문재인보다는 박정희의 후광을 등에 업은 박근혜에게 한 표를 행사했다.


그런데 상황이 이 지경이 되고보니 과연 박근혜라는 사람이 그와 같은 정치적 감각을 소유한 사람인 것인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유튜브에 보면 그의 말도 안 되는 말실수,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그만의 어법을 모은 영상이 여럿 있는데 처음에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실수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것이 정말 그녀의 본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박근혜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소위 '수첩공주'라고 부르며 멸시하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녀는 정말 누군가가 써 준 대본 없이는 명확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고도의 정치적인 감각을 띤 언사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당장 그가 그렇게도 부르짖었던 '창조경제(創造經濟)'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그 자신도 사실 모르지 않는가.


또한 최순실 게이트가 사실로 드러난다면 그 치부 덕분(?)에 설명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대표적으로 대통령의 국정(國政)과 민심(民心)에 대한 낮은 이해도이다. 윤창중 대변인 사건 이후부터 대통령이 나라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가실 날이 없었는데 이 의뭉스러웠던 부분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참 착잡하다. 잘 모르니까 밖에서 무슨 말이 들려도 관심이 가지 않을텐데, 이는 야당 및 새누리당 비박계에서 줄기차게 비난했던 대통령의 불통(不通) 이미지와 합동(合同)이다. 가정하여 최순실 씨와 관련된 의혹이 만일 전부 사실이라면, 박근혜는 박근혜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그 모든 정치 이력을 쌓아왔지만 그것을 행한 것은 정작 당신이 아닌 당신 뒤에 서 있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정작 자신이 잘 알아야 할 사안들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 하고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를뿐만 아니라, 최근 국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되먹임(feedback)과정에 필수적인 소통 과정에 관심조차 없고 아예 그러한 행위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것이다. 이를테면, 상사가 시킨 일을 무비판적으로 행하는 중간책임자들이 대체로 자신이 행한 일의 취지와 경과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에 따르는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거나 아랫사람들의 무능 탓으로 돌리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러니 박근혜의 정치 이력에 대한 호감(好感)을 바탕으로 한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윗 문단은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의혹이 모두 사실일 경우를 가정하여 쓴 것이다.)


길은 하나뿐이다. 특검의 강도 높은 수사를 통해 올해 전반에 불었던 정재계 비리와 최순실 씨 게이트를 모두 파헤쳐야 하며 대통령은 이를 해명해야 한다. 또한 대통령은 스스로 국기문란(國紀紊亂)이라고 힐난한 문건 유출을 자행한 이상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일말의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어느 수준에서 이뤄질 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지만, 합당한 자세를 보이지 않을 경우 국민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며 이것은 보수층의 분열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친박계의 정치 생명도 담보할 수 없을 것인데 여기에는 친박의 대상인 대통령도 포함될 것이라고 본다.


[덧붙여, 2013년에 페이스북 계정을 한 번 완전 삭제할 당시 굳게 마음 먹었던 것이 개인적인 공간에서는 정치적인 주장을 자제하자는 것이었다. SNS에서는 효과적으로 이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홈페이지에 이 사뭇 위험한 글을 적는 것은 현 대통령의 당선을 도운 18대 대선 투표자들 중 51.6%의 한 사람으로서 느낀 (아무도 내게 강요하지 않은) 책임감 혹은 죄책감의 발로(發露)이다. 부디 읽는 분들의 너그러운 시선을 부탁드린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