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 단어 derecho는 대표적인 다의어로,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단어라고 생각한다. 이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의 directus 인데 '쭉 뻗은'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한다. 영단어 direct나 straight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래서 derecho 의 뜻은 '곧은, 똑바른'이다.

그런데 라틴어 directus 에 등장하는 reg(c)- 이라는 어근은 '치우치거나 벗어나지 않고 곧게 나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이러한 어근을 가지는 단어들은 '곧은, 바른, 옳은'이라는 뜻이 기저에 깔려있다. 예를 들어 rectangle 은 직사각형, rectum은 직장, correct는 알맞다는 뜻이다. 때문에 스페인어 derecho 에도 '올바른, 정의, 합법적'이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자연히 이 단어는 '법'이라는 명사가 되었다.

한편, 초급 수준의 스페인어 지식을 가지고 이 단어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뜻은 '오른편의' 라는 뜻이다.잘 알다시피 과거 사람들은 오른편을 '옳은' 편으로, 왼편을 '사악한' 편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오른쪽은 '옳다'는 뜻을 가진 derecho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이는 영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어의 right 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찾다보면 라틴어 rectus가 등장하는데 right 역시 '옳다(you're right!)'는 뜻과 함께 오른쪽(right hand)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똑바로, 곧장'이라는 뜻은 친척뻘되는 단어인 straight, upright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derecho와 right 은 어원과 의미상 깊은 유사성을 보이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단 영어에서 법이라는 단어는 게르만어족에서 연원한 law라는 전혀 다른 형태를 가진다.)

그런데 영단어 right에는 '권리'라는 뜻이 있다. 특히 복수형 rights으로 사용될 경우 이것은 배타적으로 '권리'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civil rights, human rights 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스페인어 단어 derecho 에도 해당 의미가 존재할까? 그렇다고 한다. derecho는 권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 인권 선언은 스페인어로 La Declaración de los Derechos del Hombre y del Ciudadano로 번역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권리'로 번역되는 말이 스페인에서는 '옳은, 곧은, 법, 오른쪽'에 해당하는 단어로 통용되는 derecho로 널리 쓰이는 것이다.

나는 스페인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언어 감정을 향유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스페인 사람들은 '권리(derecho)'라는 단어를 듣거나 말할 때 '정당하고 옳은 법'과 같은 이미지를 연상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에서 '일손이 부족하다'라고 말하는 경우, 노동력을 '손'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우리네 전통적 사고 방식 하에서 떠올릴 만한 장면 ㅡ 예를 들면 수고로이 손으로 모내기를 하는 것이라든지 손을 바삐 움직이며 베틀에서 베를 짜는.. ㅡ 을 상상해볼 때, 충분히 설득력 있는 추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권리'라는 단어를 들을 때 그와 같은 '옳은, 법'의 느낌보다는 '취득하고자 하는 것을 요구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권세'의 느낌이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derecho의 한국어 번역어의 한자가 '권세 권(權)'과 '이롭다 리(利)'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빨갱이 교수라고 폄훼하는) 성공회대의 조효제 교수는 이에 관해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과거 서구권에서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으로 물밀듯이 들어온 다양한 개념들은 기존에 널리 쓰이던 한자어로 표현 불가능한 것들이 많았으며 ㅡ 예를 들면 과학, 민주주의같은 단어들 ㅡ 이들에 대한 번역어의 도입이 시급했다. '권리'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러한 단어들의 번역을 책임진 것이 바로 네덜란드를 통해 서구 문물을 흡수하던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권리'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번역했던 일본어 사전은 이를 염직(廉直)이라고 하였으며 수십년간 이에 대한 통일된 번역어가 없어서 진직(眞直), 통의(通義), 조리(條理) 등으로 써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1885년경에 소개된 '권리'라는 번역어가 널리 사용되어 다른 경쟁 번역어들을 몰아냈고, 이는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다보니 내심 못내 아쉬워졌던 것은 '권리'라는 한국어 단어로부터 같은 뜻을 가진 다른 언어 단어인 derecho, right이 내포하고 있는 '마땅히 법적으로 옳음'과 같은 뜻을 음미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왠지 우리 나라에서는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이 경제적인 혹은 사회적인 이권을 옹호 및 고수한다는, 약간은 부정적인 느낌을 가질 때가 왕왕 있다. 이게 번역어의 선택에서 100% 연원한 것은 아니겠으나, 그래도 꽤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권리라는 단어가 100년 이상 대중 입말에 쓰여 오면서 완전히 정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언어 감정을 단기간에 바꾸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중요한 언어를 '데레초, 라이트'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권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derecho, right'가 가지는 의미들을 모두 포괄적으로 담아낼 수 있도록 각계각층에서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인권에 대한 호소가 정치적 수사나 정략적 태도 정도로 멸시당하고, 정당하게 옳은 도덕적인 명제보다는 내 이익과 선의만을 요구하고 따지는 일이 더 흔한, 불의한 권리만이 판치는 이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