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에는 본용언과 연결되어 그것의 뜻을 보충하는 역할을 하는 용언(用言)이 있는데, 이를 보조 용언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도와드리다'라는 용언은 '돕다'라는 용언과 '드리다'라는 용언의 결합이다. 여기서 실질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본용언은 '돕다'이고 보조 용언이 '드리다'에 해당되며 보조 용언이 붙음에 따라 본용언에 대해서 '봉사'의 의미가 가미된다. 뜬금없는 한국어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것은 바로 우리 교회 신부님의 감사성찬례 강론 중에 반복적으로 지각 가능한 그분만의 언습(言習)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신부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이 '~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혹은 '~처럼 살아가야 합니다.'라고 할만한 것들을 항상 '살아내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곧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되찾고 하느님의 자녀다움을 살아내는 구원은...'

'자신의 존재 본질을 인식하고, 선포하는 삶을 살아낼 때, 비로소 자신이 됩니다.'

'... 곧 무기력, 나약함, 온유와 겸손, 비움(無, 空)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나는 처음에 이 '살아내다'라는 표현이 낯설기도 했을뿐더러 꼭 비문(非文)에서나 쓰일 법한 용언인 것같아 강론 중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외이도(外耳道) 어느 부분이 괜히 간지러워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일전에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인 표현을 반복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 교회 담임목사님의 언습 ㅡ 그는 항상 말끝마다 '되어지다'라는 말을 써서 내 심기를 항상 불편'되어지게' 했다. ㅡ 을 떠올리며 혹시라도 '살아내다'라는 표현이 그처럼 명백하게 틀린 표현인 것은 아닌지 무척이나 확인해 보고 싶었다. 구글에서 '살아가다'라는 검색어로 찾으면 약 3,210,000개의 웹문서가 검색되는데 반해, '살아내다'라고 검색하면 약 386,000개 정도만 검색된다. 거의 1/9에 불과한 것을 보면 '살아내다'는 과연 뭇 사람들이 많이 쓰는 표현이 아닌 게 맞았다. 그렇다고 이 표현이 틀렸다고 명시하는 웹문서는 없었으니 이런 표현에 오류가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낱말이 문법적으로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가지지 않아도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한편 국립국어원의 설명에 따르면 '내다'라는 보조 용언은 종결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뜻풀이를 하고 있었다.


'((동사 뒤에서 ‘-어 내다’ 구성으로 쓰여)) 앞말이 뜻하는 행동이 스스로의 힘으로 끝내 이루어짐을 나타내는 말. 주로 그 행동이 힘든 과정임을 보일 때 쓴다.'


그러므로 '살아내다'라는 표현은 스스로 어떠한 삶을 이루는 것을 말하며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산 정상에 오르는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 단어는 종국에 성취할 그 무언가를 강하게 암시하며 또 바라본다. '살아낸 사람'은 치열한 투쟁 끝에 무언가를 얻어내는데 그것은 바로 그 삶의 열매이다. 일련의 연상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살아가다'를 곱씹어볼 때 느껴지는 인상과는 사뭇 다르다. '가다'라는 보조 용언은 진행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행동이나 상태가 계속 이어지는 것을 뜻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살아가다'라는 표현은 어떠한 구체적인 지향이나 목표와는 무관하게 삶이 그저 진행된다는 인상을 준다. '살아가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흐르는 물 위에 고요히 떠다니는 뗏목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것은 비교적 수동적인 삶의 모습에 비견된다. 또한 이 단어는 목표와 끝,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살아내는 삶'과 '살아가는 삶'은 현격하게 다른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신부님의 언습은 단순한 버릇이 아니라 그분의 인생관, 그리고 신학적 관점을 포함하고 있는 표현의 한 단면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종결은 파멸적인 끝이 아니라 곧 완성(完成)이다. 물론 '살아내고 나면' 죽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그것을 단순한 파멸로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낸 삶을 통해 맛본 하느님의 사랑은 '살아냄'을 통해 완성되고 다른 이에게 전파된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는 '살아냄'을 통해 확장되고 이는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그분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져 가는 실질적 과정으로 비정(比定)되는 것이다. 비록 그 과정이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할 지라도 그 삶을 '살아낸' 사람은 마침내 부활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살아냄'의 삶, 곧 완성의 삶은 기독교에서 참 하느님이자 참 인간으로 숭앙하는 예수님이 이미 모범으로 보이셨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강생(降生) 자체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세우셨다. 또한 그는 '다 이루었다'라고 말슴하신 십자가에서 죽어 성서의 예언을 완성하셨으며 또한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한처음부터 계획된 성부 하느님의 놀라운 구속(救贖) 사역을 완성하셨다. 묵시록의 저자인 요한은 주님을 알파(Α)이자 오메가(Ω), 곧 처음과 나중이자 시작과 끝인 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심판 끝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됨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그분의 삶을 본받아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하는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그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받을 자격 없음에도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구원의 은총에 젖어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절실하게 부르짖고 있는 이 땅의 정의와 사랑을 완성하는 삶을 살아내는 자세가 요구된다는 말이 아닐까. 나는 신부님의 강론을 되뇌이며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를 앞으로 자주 생각해 보기로 했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