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병에 취약해지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라지만, 이번 코로나19는 병세와 환자 연령간 상관 관계가 극심하게 뚜렷해 보인다는 게 모든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20대 이하의 젊은 연령층은 증상이 미미한데다가 심지어는 증상이 없는 경우가 있는 반면, 60대 이상의 고령층에서는 폐렴은 기본이요 각종 증상으로 인해 고통받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 지난 2020년 전세계가 수천만명의 환자를 받으면서 알게된 경험적 사실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기저 질환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기저질환도 하나둘씩 얻는 법이니 이를 두고 병세와 환자 연령 사이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이 신체에서 면역 반응으로 인한 증상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을 생각해보면 고연령층이 겪는 문제는 높은 중증 이행률, 혹은 사망율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2020년 12월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코로나19 양성 확진자들을 격리 조치가 완비된 의료원 등의 시설로 보내 격리병동에서 생활하게 하는데, 증상이 발현된 이상 빨라도 10+3일은 병원에 있어야 한다. 문제는 40대 중 더러는, 다수의 50대는, 그리고 사실상 대부분의 60대 이상의 환자는 폐렴 등의 증세로 인해 보다 긴 시간동안의 주사제 및 항생제 처방이 내려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격리입원 기간이 보통 젊은 사람들보다는 약간 길어지게 된다. 그나마 폐렴이 발생한 정도는 중증으로 치지도 않는다 ㅡ 호흡곤란이나 고유량 산소 치료가 들어가는 순간 퇴원일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날이 되고 만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샤워를 하러 씻으러 가는 때를 제외하고는 병실을 떠날 수 없다. 걸어다니려고 해도 좁은 병실은 몇 걸음 옮기기만 하면 벌써 몇 바퀴를 돌고도 남는데,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니 맘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눈앞에는 바깥 동네가 펼쳐져 있는데 나가지도 못하고, 몸은 근질거리는데 이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물론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하릴없이 소일거리하는 아저씨들에게는 천국같은 생활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으나, 은둔형 외톨이도 자발적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거기서 행복을 누리는 것일 터이다. 만일 타의에 의한 비자발적 은둔을 강요받는다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자, 병실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우선 모두에게 모바일 폰이 있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거북목 되기를 자청하면서까지 우리는 핸드폰 속 세계에 빠져든다. 하지만 이 핸드폰 속 세계에 대한 집중력에는 10대와 30대, 그리고 30대와 50대 사이에 크나큰 차이가 있다. 모든 세대가 유튜브를 즐겨 본다지만, 10대 학생들이 유튜브를 즐기는 시간만큼 50대가 이를 즐기고 싶다 하더라도 정신적인 집중력 및 시력의 문제가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비단 유튜브 뿐인가? 저연령층으로 갈수록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이 짬나는 시간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메워준다. 중간중간에 하는 게임으로도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하지만 고연령층으로 갈수록 SNS로부터 얻는 정보는 굉장히 제한적인데다가 게임은 이들에게 더이상 탐닉할만한 대상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연결하면 무엇을 하겠는가? 애초에 일단 50대 이상일수록 노트북을 가지고 병실에 들어오는 경우가 드물다. 업무를 위한 보조적인 수단으로서가 아닌 개인용의 노트북이 있는 사람이 저연령층보다는 확실히 적다. 하지만 설사 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루종일 앉아서 12시간 이상 게임을 신나게 하는 10대, 20대 학생들처럼 이를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 저연령층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서 집중하여 무언가를 하는데 많은 훈련을 해오던 사람들이다. 물론 고연령층도 이삼십년 전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그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호소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 테다. 


따라서 고연령층이 코로나19의 격리생활로 겪는 스트레스는 저연령층의 몇 배는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0대와 20대 초반의 학생의 경우 2차 전파의 대상이 가까워봐야 가족이나 급우, 친구 정도이지 그 외에는 동선이 겹쳤을 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 학생들의 사회적 활동 반경이 그리 넓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코로나19 감염에 따라 향후 자신들의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것을 염려할 필요가 사실상 없기도 하다. 이에 반해 40대와 50대로 갈수록 2차 전파의 대상에서는 자신의 경제적 이익이나 사회적 관계 및 신뢰도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직장 사람이라든지, 자신의 고객이라든지 등등. 사회적 활동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자신이 전파시킴으로써 그 이후에 불어닥칠 폭풍의 세기가 어린 아이들에 비하자면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경우들이 왕왕 보인다. 그렇게 되면 이 병이 신체적 질병이 아닌 사회관계의 질병이라는 판단과 결합시켜보자면, 고연령층이 격리 기간 중에 겪어야 할 심리적인 스트레스는 이보다 더 심하다. 


20세기 초반에 지구를 휩쓴 스페인 독감의 경우 오히려 젊은이들 사이에서 치명률이 높았다고 하는데, 이번 코로나19는 반대로 고연령층 사이에서 치명률이 높으니 이런 상황에서 고연령층의 환자들이 겪을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몸은 더 아픈데 격리입원 생활은 힘들고, 격리입원 와중에 혹시라도 주변 사람에게 전파된 것은 아닐까, 혹은 주변에서 뭐라고 자신을 낙인찍을까 매일같이 고뇌하게 된다. 이것은 이중삼중의 고통이다.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는 바 아니지만, 왜 그렇게도 많은 의학자들이 노화와 회춘을 연구하는지 그 의의를 짤막하게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시인 시어도어 렛키(Theodore Roethke)가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고 했다는데, 역설적으로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이 퍽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화가 벌은 아닌데 굳이 바이러스가 이렇게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따를 필요가 있는가 싶기도 하고.


이렇듯 나이듦이란 거절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세상만사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을 거부하고자 하는 욕망이 들끓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슬프게도 코로나19로 인한 격리입원은 살면서 처음으로 노화에 대한 약간의 생물학적인 공포를 느끼게 해 준 첫 경험이 되고야 말았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