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과외를 하고 있다.]
Date 2009.07.12


고백하자면, 최근 단기 과외를 하나 하고 있다.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사는 한 고등학생의 1주짜리 과외이다. 사실 1주 정도를 예상한 것은 아니었는데, 하면서 재다 보니 1주 정도면 끝날 것 같다. 과목은 고등학생이라는 직업에 걸맞지 않는 무기화학(inorganic chemistry)이다.

사실 지난 겨울에 연락이 왔었던 것을 이제서야 받게 된 것이다. 글쎄, 자기 전공 정확히 이해하기도 벅찬 상황에서 무기화학이라니 다소 생뚱맞긴 했지만, 그래도 흔쾌히 수락했다. 어차피 짧은 기간동안 얕게 훑기만 하면 된다니까. 학생은 부산 영재과학고 재학중이고 현재 서울대 생명과학부인 형을 따라 방학 동안 서울대입구 근처에서 함께 지내는 중이란다. 화학올림피아드를 준비하는데 무기화학을 위해 이렇게 과외에 손을 벌렸다는 것.

처음에 물어봤다. 올림피아드에서 무기화학이 그렇게 비중있는 것이냐고. 대호는 전화통화를 통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 학생도 마찬가지의 답을 내놓았다. 학원에 다니기는 좀 그렇고, 그렇다고 남들 다 하는데 안 보기는 좀 뭐하니 단기 과외를 하게 되었다는 것. 어렵사리 구했다는 사람이 나라는 게 다소 안타깝긴 하나, 아무튼 그렇게 해서 과외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총 4번의 수업을 했는데, 최악이었던 두 번째 날을 제외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다. 학부 전공과목을 가르치려니 쉽지 않은 게 한둘이 아니다. 우선 어느 정도까지 가르쳐 줘야 하는지부터 꽉 막힌다. 물리화학에 대한 이해가 약하니 복잡한 분자 오비탈이나 점군(point group)에 대한 이야기는 그냥 넘어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거 꽤나 무기화학에서 중요한 건데. 또 생각해보니 자잘한 다양한 무기화합물의 성격이나 성질들도 논해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것을 논하다보니 실수가 잦고 스스로 오류투성이인지라 함부로 해 주기도 조심스럽다. 이 부분이 시험 대비를 위해 알아야 할 내용인지 아닌지 판가름하기도 쉽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올림피아드 시험 공부를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생각해보니 나도 KChO에 한 번 나가본 적은 있다. 그냥 호기심에 궁금하기도 해서. 물론 참가에 의의가 있었다.)

시험을 위해 어떤 것을 공부한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이 땅의 많은 한국의 취업 준비생들이 TOEIC 점수과 한자 급수를 위해 관심에도 없고 지겨워하는 영어와 한자를 공부하고 있다. 이렇게 공부한 것이 자신의 삶에 큰 자양분이 되느냐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공부하는 시간이 결코 즐겁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학생 역시 화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화학올림피아드 입상'을 위해서이다. 글쎄, 시험을 잘 쳐서 입상하면 뭐가 좋을까. 좋은 대학에 진학하겠지. 그런데 학과는 어떤 것일까. 정말 화학일까? 화학공학? 왠지 의예과가 아닐까 싶은데, 오 이런.

누군가는 화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넘치고 끓어 홀로 일반화학 책을 보며 재미있다고 두 세번 반복해서 보며 꿈을 키워갔는데, 누구는 화학 시험에 입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반화학 뿐 아니라 유기화학, 분석화학, 물리화학, 심지어 무기화학까지 공부하고 있다. 상당히 놀라운 것은, 화학올림피아드 입상자의 대부분이 화학과 무관한 학과로 진학한다는 점이다. 즉 재미있는 화학의 세계가 단순히 시험용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물론 나도 일반화학을 홀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앞으로 경시대회나 이런 것을 공부해보면 도움이 되겠다'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부차적인 것이었지 이들처럼 경시대회가 내 화학 공부의 주 목적이었던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랬다면 학원이나 과외를 다니면서 체계적으로 재빠르게 배워 나갔겠지

이쯤 되면 올림피아드 무용론이 슬슬 나올 법도 하다. 내 생각에는 올림피아드는 '선행 학습 점검 시험'이나 다를 바가 없다. 고등학생 때 '과학창의력시험'에 출전하여 상을 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나온 비판 중에 하나가 학생의 창의력을 점검하는 시험이 아니라 완전 선행 학습을 점검하는 시험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거기엔 동의했다. 고1 학생이 창의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 고2 문제도 '학교 수업을 받지 않았음에도' 풀 수 있을 거라는 시험 출제자의 순진한 발상이 문제였던 것이다. 올림피아드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대학교 화학 공부를 미리 공부했다는 것이 '화학을 탐구하는 능력'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는 TOEIC 900점을 받은 사람이 더 이상 영어를 잘 하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한술 더 떠 올림피아드에서 입상한 사람이 화학을 더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고? 올림피아드는 더 이상 그런 '실력'을 판가름하는 대회가 아니다. 이건 중간고사, 기말고사와 다를 바 없다. 단지 시험 출제범위가 대학화학일 뿐.

올림피아드로 인해 일어나는 각종 폐해를 나는 지금 벌써 목도하고 있다. 다양한 책도 읽고, 관련된 여러 가지 공부를 하면서 방학을 의미 있게 보내야 할 학생이 입구역의 한 오피스텔에 쳐박혀 온종일 대학 전공 서적만 공부하고 있다. 부산 영재과학고등학교에서 어떤 수업을 제공하는 지 알길이 없으나 내 생각에는 이 학생의 영어 실력은 내 중학교 수준에 불과할 것이고, 음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무하며, 니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나는 이 시기에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갔었다. 지금은 유기화학 반응의 메커니즘과 열역학 제 2법칙의 수식표현을 공부하며 희열에 젖어 있겠지만, 그걸 바라보는 나는 정말 이 아이가 한편으로는 가엾고 한편으로는 한심스럽기도 하다. 지금 올림피아드로 인해 그 최고의 시간들을 한심스럽게 썩혀 버리는 학생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아니 그 학생들이 그 시간에 유기화학이나 물리화학을 봐서 뭘 하겠나. 진짜 시험용에 불과하다. 어차피 그네들이 그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다. 단지 겉핡기만 하고 있을 뿐.

참으로 애석하다. 차라리 그 학생이 화학부에 들어 온다면 지금의 고생이 보상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 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인 것을 봐서는, 난 이 아이를 과외 학생으로, 그냥 서비스를 제공해서 재화를 벋어 들일 대상으로 여겨야 할 것 같은 마음 뿐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