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징검다리 휴일이었던 10월 2일. 사실 학교에 갈까 생각했는데, 전날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공원에서 수다를 떨다 들어와서 그랬는지 너무 늦게까지 잠을 자고 말았다. 일어나보니 오전 11시 45분. 일어나자마자 good morning이 아닌 good afternoon을 외칠 시간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씻고 준비하다가 어차피 징검다리 휴일이라서 딱히 해야 할 의무도 없는데, 이참에 궁 나들이나 갈까 싶어서 옷을 다시 차려입고 곧장 지하철을 타고 종로3가역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창덕궁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조선의 여러 궁궐에 다녀봤지만 창덕궁은 변변한 사진이 없어서 아쉬운 터였다. 8년전인 2004년 1월에 장학퀴즈 youth camp에서 단체로 창덕궁 후원 관람을 했지만, 그 때 찍었던 사진들은 모두 소실된 상태로 제대로 남아 있는 사진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늘 창덕궁에 가고 싶었던 마음이 들었는데 이제야 가게 된 것이다. 물론 연휴 기간이라 사람이 너무 많았고 후원은 이미 매진된 지 오래. 하지만 후원이 목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후원은 개인적으로 눈에 파묻힌 뒤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에 상관 없었다.


창덕궁에서 한 2시간 정도 돌아다닌 것 같다. 확실히 조선의 궁궐은 아름답다. 예쁘다. 웅장한 것은 인정전(仁政殿)과 같은 전각에서도 느낄 수 있다. 경복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 독특한 전각의 구조와 양식을 창덕궁에는 찾아볼 수 있다. 청기와를 여전히 올려놓고 있는 전각도 있고, 행랑이 연결되어 다른 전각으로 이어지는 전각들도 많다. 특별히 창덕궁에는 낙선재를 위시한 독특한 건물들이 있는데 모두 단청이 없는 다소 수수한 양반집같은 느낌이 드는 전각들이다. 다른 전각처럼 화려하지는 않으나 소박하고 멋스러운 그런 느낌이 살아 숨쉬고 있는 그런 곳으로 이런 한옥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에 창덕궁 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려야겠다.


창덕궁에서 나와서 종로를 걷다가 던킨도너츠에서 도너츠를 먹으며 요기를 하기도 했고, 주변의 삼성모바일샵에 들러 Skype로 아버지와 영상통화를 하며 최근 궁금해 하시던 Galaxy Note 10.1 을 자세히 보여드렸다. 필기감이 생각보다 너무 괜찮아서 아버지께서 영상으로 보시는 앞에서 즉석으로 글을 쓰고 블루투스 키보드 도크로 타자를 쳐서 보여드리기도 했다. 탑골 공원에도 들어가서 사진도 찍었다.


우연히 교회 동기인 대근이가 근처에 (나와 비슷하게) 홀로 밖에 나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우리는 동행하게 되었고 저녁을 먹은 뒤 근처 서울극장에서 '광해, 왕이 된 남자'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물론 너무나도 유명하고 식상한 '왕자와 거지'류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결과 내용의 전개 및 웃음요소들은 뻔하긴 했다. 다만 한국사를 다뤘다는 점, 음모론을 다뤘다는 점, 권위의 전복이 있다는 점, 애국심을 자극했다는 점, 이병헌을 주연으로 내세웠다는 점 등등을 적절히 버무린 결과 흥행가도를 잘 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 궁금해서 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관련 내용을 찾았는데 줄거리를 쓴 사람이 그래도 고심을 한 것 같기는 하다. 실제로 '숨겨야 할 일을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고 전교한 내용이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 등장하지만 광해군 8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재위시절 동안 여럿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홍보에서처럼 실록에서 15일 통째로 기록이 없는 일은 없고, 이러한 전교가 내려지는 배경에는 대부분 조선에 체류하고 있는 명나라 사람들에 의해 국내의 일이 입방아에 오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왕을 바꿔치기했다는 이야기는 순 허구라고 보는 것이 당연하겠다.


하지만, 이 모든 허구를 진짜 비슷하게 느끼게 해 주는 인물은 광해군 자신이 아니라 바로 허균에게 있음을 이내 알게 되었다. 광해군 9년에 허균은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능지처참을 당하는데, 그는 선조-광해군 시기의 문신 중에서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않고 역적의 화신으로 두고두고 비난받은 거의 유일한 사람이며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문점들이 많다고 한다. 따라서 허균의 사망 시기와 비슷한 시기의 기록을 끄집어내어 줄거리를 만들게 되면 '왕자와 거지' 옛날 이야기 수준에서 꽤나 설득력 있는 미스터리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마지막 장면에서 '허균이 역성 혁명을 꾀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는 식의 문장 한 마디는 역사적 사실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만 이미 극에 몰입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야기의 당연한 귀결, 따라서 그 귀결로 인해 지금까지 전개된 스토리에 현실성을 부여해 주는 그런 장치로 작동했을 것이다.


이야기가 너무 영화로 샜다. 아무튼 이 영화가 또 내게 특별했던 것은, 바로 좀전에 다녀왔던 창덕궁이 배경으로 나왔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광해군을 비롯한 조선 후기 임금들의 주 거처는 창덕궁이었고, 인정전, 대조전 등 아까 다녀왔던 그 장소들이 나오거나 언급되었던 것이 너무너무 신기했다. 스크린에 숙장문으로 향하는 그 길이 나왔을 때 내가 막 그 길을 아까 걷고 있었는데 또 걷는 그런 기분이었다.


영화를 마치고 대근이와 함께 커피를 간단히 나눈 뒤 전철을 타고 다시 안양으로 돌아왔다. 연락해주고 영화를 보자고 제안한 대근이에게 무척 고맙다. 10월 말에 있을 형의 혼인식을 위해 축가를 준비한다는데 잘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비록 훈련소에 가는지라 그의 축가를 들을 순 없겠지만...


내일은 연휴 마지막날이지만 여전히 할 일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일 고민해 봐야겠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