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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이 구절을 들어보았지만, 항상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만 생각했지 거기에 '네 몸과 같이'라는 표현이 이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잔잔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율법의 핵심, 곧 기독교 교리의 정수(精髓)는 신약성서 『마태오의 복음서』 22장 37~39절의 말씀에서 나타난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돌이켜보면, 세상의 기독교인들은 첫째 가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참으로 열심을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주일을 지켜 예배하기 힘쓰고, 교회의 봉사와 구제를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희사(喜捨)하며, 주변인들에게 복음(福音)을 전하느라 그 어떠한 고역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근래 기독교인들을 향해 가해지는 수많은 비판은 첫째가 아닌 둘째 계명과 관련되어 있으니 바로 예수께서 강조하신 이웃 사랑이 그들에게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타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기독교인들의 행태에 모두들 혀를 차는 것이다.
대체 왜 그럴까? 나는 오늘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이유를 '자기 사랑이 결여된 현대인'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시대만큼 건전한 자기애(自己愛)가 사라진 시대도 없다. 인터넷, 그리고 소셜 미디어를 비롯한 수많은 소통 수단의 발전은 우리 삶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동시에 우리를 주변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던 시대는 어느새 사라지고, 이제 우리는 항상 더 가지기 위해, 더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경주(傾注)해야 하는 시대이다. 하지만 극소수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누가 그 수많은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남들이 보여주는 '정해진 길'을 가지 못한 불만과 좌절감은 자기 자신을 품고 사랑할 마음조차 꺾어버렸고, 결국 남을 사랑할 공간조차 침범하였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못한 결과는 곧 남을 향한 몰이해(沒理解)와 배제(排除), 그리고 극단적 증오로 이어지게 되었으리라.
물론 건전하지 못한 자기애는 큰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3장에서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 때에 사람들은 이기주의에 흐르고 돈을 사랑하고 뽐내고 교만해지고 악담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감사할 줄 모르고 경건하지 않고." 어디 불건전한 자기애가 이기주의만 있겠는가? 자기 연민과 피해 의식에서 비롯된 자기 방어도 과하면 문제가 되는 법이다. 그런데 성서에서 일견 상반된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은 필시 극단적 해석을 피하고 두루 살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고로 나는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비열한 이기심에서가 아닌, 하느님의 자녀로 소망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나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본능적 배려와 격려에서 출발하는 자기애를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이 결국 내가 스스로에게 품는 자기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임을.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
기독교 교리를 공부하다보면 A라는 주장과 B라는 주장이 교묘하게 대치하는 듯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경우가 참 많다. 예를 들어 바울로의 이신칭의(以信稱義)와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라고 말한 야고보의 가르침은 모순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극단적인 해석만 배제한다면야 두 사람의 주장이 반드시 양립 불가능한 말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선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행동으로서 믿음을 굳건히 하고 증명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처럼, 자기애를 가진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기애를 굳건히 하고 증명함으로써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