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부터 실험실에 합류한 중국인 박사후연구원이랑 꽤 자주 이야기하는 편이다. 이 친구는 나보다 네 살 어린데 노스웨스턴(Northwestern) 대학에서 박사를 하고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몇 번 이야기를 나누다보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가까운 미래에 교수 직업을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이며 그 열망이 너무나도 강해 교수가 되지 못하면 실패한 것으로 느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는 박사과정 때 그러하지 못했으니 논문도 많이 써야 하고 생산적인 프로젝트도 많이 진행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데, 가끔 진행하는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못해서 침울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로 오늘처럼 말이다. 나노크기의 섬유를 제조하는데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해보니 영 엉뚱한 구조만이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오늘 하루종일 한숨만 푹푹 내쉬기에 저번에도 징징댔지만 결국 잘 해결되지 않았느냐, 이번에도 거뜬히 해결될 수 있을거다 얘기를 해 주었지만 뭐 큰 위로가 되진 못한 모양이다. 뭐, 날로 경쟁이 치열해져가는 교수 시장에서 영향력이 큰 논문 없이 교수가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마큼, 지지부진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속상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도 한동안 실험이 너무 잘 안풀려서 하루는 그냥 다 포기하고 엉엉 울어젖힌 적도 있긴 하다. 그게 첫 포닥 연구를 시작한 지 4~5개월째 되는 때였으니, 이 친구도 그런 걸 느낄 시기가 되긴 했지.


하지만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논문을 쓰지 못해 교수가 될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우울해 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우리같은 박사후연구원들은 연구가 즐겁고 재미있어서 아카데믹 커리어를 추구하는 것이고, 교수가 되지 못한다면 다른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정부 혹은 기업 연구소에 취직할 수도 있는 것인데. 사실 교수가 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하고 싶은 연구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방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도구'가 '목적'이 되어버리니 연구에 임하는 자세가 뒤틀릴 수밖에 없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논문이 잘 나올만한 연구만 진행하는 것이고, 전도 유망하거나 혹은 요사이 각광받는 주제가 아니면 별로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참고로 이 친구도 너무 목적 지향적인 경향이 있어서 논문이 될만한 연구 주제가 아니라면 굉장히 심드렁해한다.)


물론 교수가 되는 것, 중요하다. 고생해서 박사학위를 따고 박사후연구원까지 되어 이역만리에서 생고생을 하고 있는데 교수가 되지 않으면 남들은 일찍 취직해서 돈을 벌며 사회 경험을 쌓고 있는 동안 내가 지금까지 연구에 쏟았던 열정과 시간은 어디서 보상받는가? 논문과 연구비 수주가 내게 실질적인 이득을 챙겨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교수라는 직업이 얼마나 좋던가! 직업적 측면에서 교수만큼 자유로운 직업이 없으며 ― 물론 연구비를 따느라 고생 꽤나 하겠지만 ― 교수가 된다는 것은 (정년을 받는다는 가정 하에) 방대한 지적 호기심을 학생들과 함께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재미와 희열을 나이 들어서까지 유지할 수 있다는 축복을 받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에서는 교수의 사회적 지위가 그래도 높은 편이며 어딜 가나 교수님 대접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사람이 늘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신선같은 삶을 현세에서 누릴 수는 없기에, 아카데믹 커리어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교수가 된다는 것은 당연히 바랄만하고 또 그것이 현실적인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과연 교수가 되기 위해 연구를 해야 한다는 자세가 건강한 태도인지는 의문이다.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는 것 하나도 없을진대 그렇게 안달복달하면서 자책하며 스스로를 저 침잠(沈潛)의 못으로 가라앉혀 버리는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의 태도인가에 대해서는 모두가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건 우리 탓도 아니다 ― 이 모든 것은 급팽창한 현대 과학연구 시장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양산된 박사학위자를 수용할 만한 일자리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태생적인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쟁은 나날이 치열해져가고 박사학위 이후 정규직을 갖게 되는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점차 길어져만 가는 것이다. 야속한 현실이지만 어디 연구직 뿐인가, 한국이나 미국이나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나라의 사회 모든 분야가 다 그러한 것을.


그러니 나를 사랑하고 나 자신이 하는 일에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지. 연구를 하는 게 재미있고 또 보람차다! 이것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것을 '잘하는 것들 중 제일 잘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오늘 하루를 산다! 그러니 (7~8개월 전만해도 감히 이러진 못했지만) 하루의 실험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먼 길을 내다보며 즐겁게 지내자! 그런데 어찌보면 이런 자세는 당연한 것인데 이렇게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사치로 느껴지는 것이 좀 슬픈 일이긴 하다.


언제 그 친구를 집에 불러서 맥주라도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