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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마트의 약사는 이 말을 듣자마자 안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꺼내온다. 어라, 그런데 약 상자가 두 개다.
"여기, 알보칠이 있는데요." 약사는 청산유수(靑山流水)와 같이 말을 잇는다. "이게 사실 일제(日製)예요." 고민할 틈도 주지 않으면서 다른 약상자를 들이밀며 덧붙이는 말씀: "여기 이 약은 국산이거든요? 가격도 더 저렴하고요. 한 번 보세요."
뭐라 할 말을 잃은 나는 물끄러미 약의 유효성분을 확인해 보았다. 알보칠 ㅡ 1 g 중 폴리크레줄렌이 360 mg. 페리터치 ㅡ 1 g 중 폴리크레줄렌이 360 mg. 벤젠설폰산(benzenesulfonic acid) 계열의 화합물이 중합되어 있는 형태의 폴리크레줄렌이 구내염(口內炎)을 치료하는 이 약의 핵심적인, 그리고 유일한 약 성분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구내염을 치료하는 방식이 다름아닌 '염증 부분을 강한 산성 용액으로 지져버리는(!)' 것이므로 분자량이나 중합 형태에 차이가 있다 한들 약효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따라서 상품명만 다른 두 약병에 들어있는 용액은 농도가 동일하니 약효는 동일하다는 것이 나의 결론. 그러니 가격이 더 싸면서도 약효가 동일한 복제약을 구매하는 것이 21세기를 사는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서 당연한 선택이다.
그런데 약사는 왜 알보칠은 일제고, 페리터치는 국산이라고 굳이 앞서 얘기했던 걸까? 물론 이 약사에겐 알보칠 대신 페리터치를 소개하고 팔아야 할 (제조자로서가 아닌 판매자로서) 약사의 의무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냥 2~3천원 더 싸다고 얘기하면 으레 알아들었을 사항일진대 때지난 애국 프로파간다인 일본 불매 운동을 운운하다니, 찰나의 순간이지만 나로서는 좀 어이가 없었다.
마침 알보칠만 사려던 것은 아니었기에, 기왕 예상보다 싼 가격에 폴리크레줄랜 용액을 구매한 김에 남는 돈으로 내가 즐겨 찾아 쓰는 구내염 치료제인 '아프타치'도 한 통 같이 달라고 (일부러) 요청했다. 순간 약사의 표정에서 살짝 민망한 티가 배어나온다.
"아프타치는 알보칠이랑은 구내염 치료 방식이 달라서 말이죠."
아까와는 달리 수줍게 약사는 말을 잇는다.
"이건 연고같이 안에 직접 붙여서 쓰는 거라 완전 다른 건데."
나는 재빨리 답한다.
"아, 제가 둘 다 즐겨 써서요. 구내염 크기가 크지 않을 때는 아프타치 쓰면 편하더라구요. 이렇게 주세요."
"네. 10,500원입니다."
결제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아프타치 상자 옆면을 슬쩍 살펴 확인해 보았다. 그럼 그렇지. 아프타치는 일본의 테이진 파마(帝人ファーマ) 주식회사에 제조한 제품으로, 국내에서는 (주)동화약품이 수입해서 판매하고 있다.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알보칠은 일본 최대의 제약회사인 다케다(武田)약품공업주식회사의 독일 자회사(Takeda GmBH)에서 제조한 뒤 한국 자회사인 (주)한국다케다제약에서 수입하여 판매하고 있다.
그렇다면 약사는 이 거대한 다국적기업들의 경제 및 산업 생태계를 도대체 알고나 말하는 것이었을까? 어떤 것이 일본산인가요? Takeda GmBH는 일본회사인가요? (주)한국다케다제약은요? (주)동화약품은 매국 기업인가요? 아프타치는 일제라고 말씀 안 하시네? 그럼 국산 약의 정의는 대체 무엇인가요? 나나 당신이나 국산이든 외국산이든 효능 좋고 가격도 적절한 약을 사고 팔아야 서로 좋은 이 경제 시스템에 사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도대체 누구 앞에서 약을 파시는지? 그래, 내가 동네 약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단순한 이야기에 공감했을 지 생각해보면 뭔가 아찔하다.
너무 선비같은 태도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비천한 집안이라서 주변에 뒤지면 더러운 게 많이 나온다는 어떤 이의 (아무)말에도 공감어린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이토록 많은 걸 보면 오지랖 넘게 넘겨짚는 과민반응도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
안녕하세요! 제가 생각하는 선비상이라고 한다면, 『예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군자는 간사한 소리와 어지러운 빛깔을 귀와 눈에 머물러 두지 않으며, 음란한 음악과 사특한 예절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태만하고 사악하고 편협한 기운을 몸에 베풀지 아니하여, 귀와 눈과 코와 입과 마음의 지각과 몸의 온갖 기관으로 하여금 모두 순하고 바름으로 말미암아 그 옳은 도리를 행하여야 한다." 과학을 공부한 입장으로서 저는 이를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진정한 선비란, 배운 것과 경험한 것을 토대로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배격하고 올바르다 생각하는 언행을 관철하는 것이다."
문제는 올곧고 바른 것과 고집불통이면서 수구적인 태도는 전혀 별개의 것인데, 조선시대 양 난(亂) 이후 서인(西人) 중심의 성리학 교조주의가 대두된 뒤, 19세기 이후 유림들이 보인 시대에 뒤떨어진 태도가 선비에 대한 작금의 인상 ㅡ 즉 과거의 것에 얽매여 새로운 것을 배격하며 지적질만 해대는데, 알고 보면 정작 실속있는 학식과 지혜는 갖추지 못한 백수들 ㅡ 이 굳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보편적인 2021년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들에게 공개된 이 글에서 ,'선비같다'라는 표현은 이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지요.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들은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간에 이런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과거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그랬고, 정치 지도자들이 그랬으며, 학자들은 물론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도 그러했지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하긴 하지만, 과학의 역사를 훑다보면 이런 자세가 인류 사회 발전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비록 이룬 것 없는 보잘 것 없는 작은 학자인 제가, 스스로 '선비'임을 자처하면서도 이런 선비가 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
이런저런 글들 재미나게 구경하고 있습니다 :) 아프타치 애용자로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는 엄살쟁이라 알보칠은 엄두도 못내는데 대단하세요 ㅎ 마지막 부분에 "선비같다"는 부분이 좀 걸렸는데, 지난 몇달간 조선시대 문묘 종사와 계보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보아온 "벽이단"을 강조하는 조선의 주류 선비 이미지와는 대조되는 듯 해서 선비란 뭘까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초기까지 나름 열려있던 사고방식의 학자 정신은 왜 사라졌을까, 그런 정신이 주류가 될수는 없었던걸까 등, 햇병아리지만 정치학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는 제 관점에서는 아무래도 생각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더라구요. 플루오르님께서 생각하시는 선비상은 어떤건가 궁금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