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방비를 아껴보겠노라며 보일러를 아예 끈 뒤 지난 설 연휴동안 ㅡ 거의 이레간 집을 비웠던 것인데, 오늘 아침 오랜만에 집에서 일어나보니 집안이 냉랭한 것이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는것만 같았다. 예감은 적중했고, 보일러는 밤새 작동하지 않은채 '물보충'이라는 글자 아래의 주황색 램프를 깜빡이며 무언(無言)의 요구를 하고 있었다.


물보충이라니 이게 무엇인가, 나는 눈을 부비며 보일러가 위치한 다용도실에 갔고 밤새 싸늘하게 냉각된 다용도실은 잠옷만 입고 서 있기에는 너무 추웠다. 보일러 겉면에 물보충 램프가 점멸하거든 물보충 밸브를 열어 만수(滿水)가 될 때까지 물을 채우라는 지시를 확인한 나는 물보충 밸브를 찾아 돌리려고 하는데. 이게 왠걸, 고무마개로 덮여 있어 도저히 밸브가 돌아가지 않는다. 도대체 누가 밸브에 이런 덮개를 씌운 것인가?


한참 낑낑대다가 가위를 들고 와서 고무 덮개를 잘라 제거했다. 원래 이런 고무마개가 씌워진 상태였던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이, 그냥 그때는 무조건 저 밸브를 돌려야만 살 수 있다는 어떤 모종의 절박감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고무마개가 제거된 밸브는 돌림힘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동전 테두리처럼 홈이 나 있었다. 그제서야 안심하며 밸브를 돌렸고, 어느새 물이 콸콸콸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물보충 램프는 그 빛을 거두었다. 다용도실의 창밖으로 보일러에서 세차게 뿜어내는 수증기가 보였고, 나는 이로서 아침녘 보일러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에 보일러 관련 문제를 주변에 토로한 적이 있었다. 보일러를 틀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꼭지에서 정체 모를 냉수가 간헐적으로 쏟아진다는 것이었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그런 현상은 처음 들어보았다며, 문제가 있다면 보일러 기사에게 문의를 해 보라고 하였지만 나는 거기까지 손이 미쳐야 할 심대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물보충 문제를 겪고 보니, 왠지 이 두 상황이 알지 못할 어떤 변수로 서로 엮여 있는, 소위 의존적인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엔 날이 춥다보니 밤새 보일러를 돌렸다가 출근 전에는 '외출'로 돌려놓곤 했는데, 이토록 보일러가 잠시도 쉬지 않게 했을 때에는 문제가 없더니, 이레동안 보일러를 꺼 두자 이런 문제가 드러났다. 글쎄, 사람도 마찬가지인가 ㅡ 한창 쉼없이 일할 때는 별 문제 없이 괜찮다 여기며 살아갈 수 있었지만, 잠시 일에서 떨어져 쉬어보니 미처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와 상처를 내면에서 목도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