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시절 모 그룹의 연구원 왈, 서울대학교 화학부의 서정헌 교수님이 1980년대에 Journal of the American Chemical Society에 논문을 게재했던 것은 경천동지(警天動地)할 사건이었다고 말하면서 "그건 요즘 시대로 치면 스리랑카의 교수가 Nature에 논문을 낸 거나 다름 없는 거야!"라고 평했던 적이 있었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언짢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스리랑카의 연구자들도 나름 뛰어난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도 스리랑카만큼 가난했던 적이 있었거늘, 우리가 거쳐 온 개발도상국의 과거를 너무 빠르게 잊은 채 우리 뒤편에 서 있는 나라 사람들을 너무 폄하하는 것은 아닌지 ㅡ 즉, 개구리가 올챙이였던 때를 생각하지 않는 진지하지 않은 발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달에 어쩌다가 중국, 파키스탄, 우간다(!)의 연구진이 투고한 논문 여러 편을 동료평가 심사(peer-review)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논문 제목이 딱히 이목을 끄는 새로운 일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논문을 읽다보면 뭔가 깨달을 만한 어떤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내가 그 논문에서 발견한 것은 망각... 아니 절망 뿐이었다. 분석 도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었다. 근거가 결여된 실험결과의 해석과 판단에 대해 너그러운 시선을 유지하기가 힘든 지경이었다. 심지어 어떤 연구진은 논문 쪼개기(영어로 salami publication)를 대놓고 시도한 것이 눈에 훤히 보이기까지했다. 정말 그런 개발도상국에서 연구 부정 없이 정확한 데이터 해석을 기반으로 좋은 연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처참한 생각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4-50년전, 미국이나 유럽에서 한국인 과학자들의 연구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것을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것에 비유했다면, 한국에서 제대로 된 과학기술 연구 풍토가 자리잡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난꽃이 피는 것 정도로 비유할 수 있지 않았을까? 변변한 교재도 없고, 실험 도구도 없고, 과학자 커뮤니티 자체가 전무한 이 땅에서 무슨 과학기술 연구를? 하지만 2022년 현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앞서 간 한국의 옛 교수님들이 전후(戰後) 막장같은 상황 속에서도 나름의 대학 전통을 확립하면서 세계적인 수준에 걸맞는 교육 및 연구 여건을 일구기 위해 노력한 덕분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앞선 세대의 연구 행태에도 분명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겠지만, 오늘날 한국 연구자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무시받지 않고 나름의 목소리를 내며 세계적 연구 네트워크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건, 연구 윤리 위반이나 꼼수를 부리는 것들을 스스로 자제하는 연구 분위기를 만들었던 건, 어찌 보면 다 그분들의 노력 덕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적 성과가 출신 국가명으로 드높여지거나 폄훼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달에 너무 호되게 당해서 당분간은 서구권이나 일본/한국 출신 연구 그룹에서 쓰인 논문이 아니면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 ( 특히 우간다의 그 대학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저널 편집자들이 보내는 리뷰 문의 메일에는 저자에 대한 깊은 정보가 없는걸 어떻게 하나? 그러면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가 낮은 저널의 리뷰 요청은 모두 거절하는 게 맞는가? 보통 거기에는 과학 연구 수준이 높은 연구진들이 투고를 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동료평가는 일종의 과학 업계의 공동의무이자 상부상조(相扶相組)인만큼 이걸 등한시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말이다. 고민이 깊어만 간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