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기에는 어제의 일부터 기술(記述)되어야 마땅하다.
어제 동욱이를 만났다. 내 생각에는 이게 거의 4~5년만인 듯 싶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교였지만 고등학교 때 나는 신성고, 얘는 안양고를 가더니 대학은 나는 서울대(SNU) 화학부, 얘는 포항공대(POSTEC) 신소재공학과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때에 서로 다른 학교임에도 일반화학(一般化學)이나 유기화학(有機化學) 교재를 보기도 했고, 이미 진학한 학과가 이공계인데다가 물리(物理)도 복수전공(複數專攻)하는 입장도 같기에 어찌 보면 중, 고등학교 통틀어서 가장 비슷한 상황을 겪으며 ㅡ 하지만 환경과 생각은 완전히 다른 ㅡ 공부를 해 온 셈이다.
잠실(蠶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나는 공익근무요원을 기대하고 머리가 짧은 모습을 기대했건만 완전히 빼 입고 나온 게 아닌가. 상황을 알고보니 그제부로 소집해제(召集解制)되었단다. 9개월만의 일종의 '전역(轉役)'인 셈이다. 이유는 신체검사 5급판정으로 인한 병역면제. 알고보니 손을 심하게 떠는 증상(症狀)이 있었단다. 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어제 보니 그제야 알게 되었다. 흠. 결국 내 주변엔 존재하지 않았던 '신의 아들'을 드디어 보게 된 것이다.
저녁식사는 잠실 롯데 캐슬 프라자의 '예원(豫園)'이라는 이름의 중식당(中食堂)이었다. 자장면이 8,000원을 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는 무척 놀랐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로 불러냈는지. 하긴, 잠실에서 살고 있는 애의 소비수준(소비수준)이 다르다는 것이 바로 이런건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특히 공익 생활 때부터 유학(留學)을 준비하려고 TOEFL과 GRE 공부를 시작하려던 동욱이에게 때마침 찾아온 소집해제 소식은 꽤나 반가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나야 뭐 지금 당장 유학할 생각은 없고 또 적어도 석사까지는 이 곳에서 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동욱이는 아예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거기서 직업(職業)을 잡고 싶은 모양이다. 이게 나랑은 완전 다르다. 나는 유학을 하게 된다하더라도, 물론 포닥은 외국의 여러 기관이나 연구소를 다니면서 하는 게 좋겠지만 최종적으로는 대한민국에서 일하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오신 외숙부(外叔父)께서는 아예 외국에 눌러앉으라고 하시는데 동욱이가 딱 그 생각과 같은 것이다. 내가 너무 순진하게 애국심을 마음 속에 품은 걸까? 흠.
학점 이야기, 수업 이야기, 학교 이야기 등을 하면서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새 시간이 늦어 잠시 화장실을 갔다오고 이제 안양을 향하는 1650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문제 발생. (여기서부터 오늘 일기 시작)
휴대폰을 화장실에 두고 온 것이다.
머리 속이 정말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누가 호기(好期)를 잡았다고 좋아라 하며 통화를 막 써대면 어떻게 하지. 문자랑 메모에 저장된 각종 내용들은 어떻게 하지. 이런. 배터리가 거의 나갔을 텐데 영영 못 찾으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부터 시작해서 '요즘 영상통화 폰들이 나오던데 그게 얼마정도 할까.' 이런 생각도 막 하고 있었다. :)
아무튼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가다가 갑자기 끊어졌다. 어라?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다시 걸었다. 그제야 전화를 받았다.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안심했다. 이 분은 분명 화장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시리라.
정확했다. 휴대폰을 그렇게 흘리고 다니면 어떻게 하냐고 하시는 아주머니. 아이고, 고이 간직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는 내일 휴무(休務)이므로 사무소장(事舞所長)에게 휴대폰을 맡기고 갈테니 내일 와서 찾아가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오늘 새벽 5시까지 잠을 못 잤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 그날 잠을 못 자서 아주 괴로워하는 타입. 게다가 늘 에스프레소(Espresso)를 마시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영향력이 큰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오늘 양자물리(量子物理)2 수업을 들어가지 못하고 12시가 되어서야 등교할 수 있었다.
급한 마음에 자동차를 몰고 갔다. 이게 실수였다.
오늘 따라 학교 주차료(駐車料)가 너무 많이 나왔다. 게다가 잠실까지 차를 타고 가는데 차는 왜 이리 막히던지. 처음으로 강남구(江南區)쪽을 내가 차를 몰면서 지나가봤는데, 무슨 시간이 퇴근시간도 아닌데 차가 너무 많다. 진짜 우리 나라에 차가 많이 다니는구나 느꼈다. 아, 2호선 노선을 따라 차로 이동하니 솔직히 돈이 아까웠다. 기름값이 전철값보다 훨씬 싼데.
그래도 좋은 구경인 것은 강남에 즐비한 건물들과 거기서 풍겨나는 도심(都心)의 향기랄까. 아무튼. 안양에서는 이런 기분 못 느끼니까.
점점 석양이 물들어가는 저녁에야 잠실 롯데 캐슬 프라자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 발생. 아주머니가 말씀하신 지하 1층의 미화원(美化員) 사무소가 어디인지 도통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롯데 캐슬 프라자에서 뱅뱅 돌아다니다가 금새 지쳐버릴 것 같았다. 겨우 물어물어 찾은 사무소. 그런데 직원 왈 '소장님이 야간 출근이신지라 6시 반 정도 되어서야 오실텐데요.'
그 때 시각은 5시 15분. 이렇다면 내가 굳이 차를 끌고 올 필요가 없었잖아!!!! T.T
결국 1시간 반 동안 프라자의 쇼핑 매장을 전전(轉轉)했다. 주로 교보문고에 있었는데 Hot Tracks에 가서 음반구경을 하는데 40분을 썼다. 놀라운 것은 확실히 사람들의 취향이 달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혹은 규모가 커서 그런 지 모르겠지만 진열된 Classic CD, Jazz CD가 안양 Hot Tracks의 3배는 되었다. 진짜, Classic CD가 그렇게 많다니. 물론 Jazz CD도 많아서 아주 좋았다. 기왕에 온 김에 몇 장 살까 하다가 인터넷에서 사는 게 포인트 쌓기에도 좋고 '지름'을 피할 수 있으니 더 현명할 거라고 다독이고는 그냥 구경만 했다.
Bill Evans 앨범이 별로 없는 게 안타까웠으나 Miles Davis 앨범이 여럿 있는 게 눈에 띄었고... 또 여럿 있어서 아주 즐겁게 CD를 구경했다.
그 다음으로는 서점. 처음엔 MM Jazz나 Newton 등 잡지(雜志)를 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알차지 못한 것 같아서 그냥 안 사기로 했다. 이 곳 저곳 기웃거리다가 눈이 멈춘 곳은 교양과학도서 판매처와 과학외서(科學外書) 진열대. 특히 과학 원서 교과서를 진열한 곳은 꼭 우리 학교 서점을 보는 듯했다. 이야.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서점에서 책을 사면 주차료를 할인받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급히 책을 질렀다. 결국 눈에 밟히던 '파인만의 QED 강의'와 J.J.Sakurai가 쓴 'Modern Quantum Mechanics'라는 책을 샀다. 좀 생뚱맞은 QED(Quantum Electrodynamics, 양자전자기학)이지만 일반물리학 공부할 때부터 왠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sakurai책은 이전부터 한 번 쯤 갖고 싶었다. 물론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냥 갖고 싶었다. 읽어보고 싶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보고 싶었다. 양자역학이라서.
이렇게 한번 지름신이 지나가고 나서야 사무소장님을 만나 뵙고 휴대폰을 찾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사들고 간 비타500 드링크 박스를 전해 드리면서 핸드폰을 찾아주신 분께 사례하는 의미로 동생이 제작한 귀걸이 한쌍을 드리며 그 분께 전해달라고 부탁드렸다. :)
그러고 롯데 캐슬 프라자를 나오는데 시간은 7시. 밖은 이미 어두컴컴. 나는 1560번 광역버스가 안양으로 돌아오는 길을 따라 잠실역을 출발하여 성남쪽을 향해 죽 달렸고 장지역을 지나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로 빠져 안양을 향해 냅다 달렸다. 물론 첫 출발 때 차선을 잘못 잡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잠실대교를 건너 광진구를 잠깐 다녀가는 바보짓을 했지만 덕분에 잠실대교에서 주변 한강의 야경을 만끽(?)하는 행운을 누렸으므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간 핸드폰에 연락이 몇 번 있었다. 나중에 SFC 간사님이 전화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사고라도 나서 전화도 안 받고 학교에서도 전혀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말씀하셨다. 어이쿠. 주변 분들에게 너무 심려를 끼쳐드렸구나.
자자. 아무튼 이제 집에 들어왔고 그간 일들은 다 정리되었다. 놀랍게도 어제 통계열역학, 역학, 양자물리 숙제를 거의 끝내는 바람에 지금은 좀 여유를 갖게 되었다. 너무 정신이 없는 이틀이었지만 아무튼 나름 값진 시간들이었다고. 그렇지? :)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