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당구(撞球)에 빠졌다. 원래 연구원들과 함께 (늘 그렇듯) 별다른 목적 없이 밥 먹고 한 판 친 것이었는데, 그날따라 '공은 왜 내가 예상한 경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인가?'하는 것 외에 유난히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 내가 치는 공에 인가된 회전 운동은 경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인가? 

- 내가 치는 공의 비탄성 충돌 이후의 공의 경로는 일정 수준에서 예측 가능한 것인가? 

- 내가 치는 공의 회전 방향과 맞히는 공의 위치는 향후 충돌 이후 공의 회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 큐가 공을 때릴 때 충격력의 크기 차이가 공의 진행 방향 및 회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인가?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입학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나를 당구장으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이내 곧 나는 수많은 용어들에 혼란을 느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을 가르치는 아버지의 태도는 으레 그렇듯 고압적이지 않던가? 결국 나는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고, 당구는 내 취미가 될 수 없다고 단정지은 채 딱히 당구에 대한 흥미를 키우지 않았다. 그런데 그랬던 내 안에서 호기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ㅡ 그것도 서른 일곱에서 서른 여덟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


요즘 공을 가지고 하는 모든 운동은 회전이 제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스포츠 경기에서 다루는 모든 공에는 회전 대칭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사람도 공에 가하는 힘의 크기와 방향을 제어함으로서 운동하는 공의 속도와 방향을 비교적 정확하게 조절할 수 있지만, 그 공의 회전까지 정확하게 제어하기는 무리이다. 공을 움직이게 만드는 요소 ㅡ 그것이 손이나 발, 혹은 큐와 같은 물건이 될 수도 있다. ㅡ 와 공 사이 찰나의 접촉을 세밀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회전은 절대 제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의 회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임에 틀림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당구가 정말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축구나 야구, 농구같은 게임들은 체력적인 한계도 있지만 일단 혼자할 수 없는 게임이다. 하지만 당구는 원한다면 혼자 칠 수도 있고, 또 그리 많은 체력적 부담을 요하지도 않는다. 순전히 당구대를 사이에 두고 치밀하게 계산하여 내 몸의 움직임만 제어하면 된다. 그래, 이것은 마치 골프와도 같다. 골프공이나 당구공이나 한 평면 위에 고요하게 정지해 있을 뿐이다. 오직 해야할 일은 내가 생각대로 몸을 움직여 정확한 타격을 가하는 일일 뿐. 그러니 골프에 최근 흥미를 크게 느낀 내가 당구에도 크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당연지사.


오늘 익산교육청 주최 멘토링 프로그램 수료 행사가 7시에 끝나자 집에 들어가기 전에 집 근처의 당구장에 들렀다. 웬 젊은이(?)가 혼자 당구를 치러 온 사실에 주인장은 조금 흠칫하는 것같긴 했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나 혼자서 노란 성수, 흰 성수 나눠서 각각 80씩 주판알을 올리고 신나게 쳤다. 45분쯤 지나니 치열했던 경기 한 판이 노란 성수의 3쿠션 성공으로 끝나고... 또 45분쯤 지나니 또다른 치열한 한 판이 흰 성수의 3쿠션 성공으로 끝났다. 그런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너무 재미있었다.


이미 아버지는 신났다. 당구 관련해서 전화를 하자 쉴새없이 또 회전이 어쩌고 팁이 어쩌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신다. 다음에 시흥에서 뵙거든 달라진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겠노라 호언장담했다. 이렇게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유흥거리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