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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위에 적힌 게 무슨 말인지 나는 하나도 모른다. 입사동기이자 컴퓨터 전문가인 이상석 박사의 도움을 100% 받았고, 단지 내가 선택한 것은 Intel사의 CPU와 내장 그래픽 카드를 이용하지 않고 AMD의 것과 외장 그래픽 카드를 하나 추가하겠다, 그리고 SSD와 HDD를 따로 사겠다 정도...? (사실 이것도 내가 브랜드 PC를 사려고 '요즘 컴퓨터를 요렇게 사려면 120만원 들더라고요~' 했다가 '그 무슨 컴알못 아버지 세대같은 소리를 하고 계시나'하는 이상석 박사님의 반응에 조언을 구해서 다나와 사이트에서 역경매로 조립 PC를 주문하여산 것이었다.)
아무튼 전원을 연결하고, 이번에 새로 산 모니터와 작은 스피커도 연결하고. 그런데 첫판부터 문제가 터졌다. 우선 전원을 켰는데 모니터에 화면이 뜨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래픽 카드를 따로 설치한 경우에는 모니터의 HDMI 코드를 본체 뒤에 '그래픽 카드'에 꽂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외장 그래픽 카드가 없어서 본체 뒤에 연결 단자가 하나 뿐이었는데, 이제는 두 개였던 것이다. 외장 그래픽 카드 단자에 꽂고 모니터가 신호 검색을 하게 하니 드디어 부팅 화면이 모습에 보였다.
이윽고 진행된 윈도우 설치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고, 인터넷도 이더넷 케이블이 연결된뒤 연구원에서 제공하는 고정 IP 값을 입력하자마자 순식간에 접속 가능해져서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내려받기 시작했다. 각종 오피스 프로그램과 필요한 소프트웨어 및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받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컴퓨터가 빠른 게 좋긴 좋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다가 업데이트를 진행했고 업데이트를 마친 이후 으레 그렇듯이 컴퓨터를 재시작할 필요가 있어서 껐는데, 다시 켜려고 하니 전원을 누르자 마자 3초도 안 되어서 다시 꺼지는 것이 아닌가?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되어 컴퓨터를 다시 켜는 게 아예 불가능해지자 이상한 일이다 싶어서 이상석 박사님에게 SOS를 쳤는데, 이게 알고보니 접촉 불량일수도 있다며 슬롯에 꽂혀 있는 RAM을 뽑아 후후 불더니 다시 장착시켜주셨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작동이 잘 되는 것이 아닌가! 뭔가 미신같은 주술적 행동이 실제 컴퓨터 작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소름끼치도록 신기했다. 동시에 이상석 박사님에 비해서는 나는 컴퓨터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튼 컴퓨터가 정말이지 엄청 빠르다. 부팅에 10초가 채 걸리지 않고, 인터넷도 빠르며 원하는 소프트웨어를 즉시 실행하여 구동할 수 있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7-8년된 오래된 올인원 PC 를 붙들고 세월아 네월아 하며 둥근 고리로 변한 마우스 커서가 하염없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는 울화가 치밀지 않는다는 점에서 훨씬 낫다. 생각해보면 핸드폰도 매 2-3년마다 바꾸는데 그보다 가격이 싼(!) 데스크톱 컴퓨터는 왜 그 정도 주기에 따라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냐? 이렇게 경쾌한 구동을 느끼며 희열을 매초 느끼고 있는 것을 보니 진작 컴퓨터를 살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이번에 정말 놀란 것이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조립 PC를 구매했을 때는 Intel CPU가 '샌디브리지'에서 '아이비브리지'로 바뀐다고 호들갑이었는데 요즘은 뭐 '커피레이크'라나, 아득히 그 세대들을 뛰어넘은지 오래였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내가 옛날에 산 샌디브리지는 32 nm 공정을 이용하여 제작된 CPU였는데, 커피레이크는 14 nm 공정이라고 한다. 당장 처리 장치의 집적도가 평면당 4배 이상 늘어난 셈이니 처리 속도가 무지하게 빨라졌을 것이다. 선폭만 줄어드는가? 소자의 디자인과 구조도 전부 개선되었다면 과거 샌디브리지에 비하면 커피레이크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정보를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는 괴물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지금 내가 산 AMD Ryzen 5 3500X에는 7 nm 공정이 적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대학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컴퓨터의 처리 속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10 nm 이하의 공정을 이용하여 선폭을 매우 좁혀야 하는 것이 무슨 절체절명의 과제처럼 선전되곤 했었다. 이 경우에는 일반적인 빛 리소그래피(optical lithography)로는 힘들기에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 및 적용되어야 하며 그 대표적인 대안 중 하나로 블록공중합체(block copolymer)의 유도 자기조립(directed self-assembly)을 이용한 나노구조를 대면적에서 제조하는 것이 제시되었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은 손병혁 교수님 연구실을 비롯하여 현재는 시카고 대학에서 재직 중인 Paul Nealey 교수님 연구실, MIT의 Caroline Ross 교수님 연구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텍사스 주립대학의 Grant Willson 교수님 연구실과 같은 해외 연구 그룹뿐 아니라 KAIST의 김상욱, 정연식 교수님 연구실, 포항공대의 김진곤 교수님 연구실과 같은 국내 연구실 등지에서는 PS-PMMA나 PS-PDMS와 같은 블록공중합체를 이용하여 이런 정렬된 수직 나노구조를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꽤 놀라운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최신 공정들은 산업 공정 현장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어렵다는 것이 한계로 지적되었고, 실제로 산업계는 이러한 과학기술계의 나노과학 연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공장에 최적화되어 있는 빛 리소그래피 공정을 더욱 한단계씩 업그레이드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노력이 정말 어마어마했던 모양인지, 이제는 10 nm 근처의 선폭을 만들기 위해서 들이는 시간과 돈이 과거 10년 전 30 nm 근처의 선폭을 만들기 위해서 들이는 그것들과 거의 비슷해졌다는 것이다.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반도체 회사들이 CPU에 적용되는 리소그래피 공정을 혁신시켜 선폭을 줄여나감에 따라 블록공중합체 연구 분야들도 다른 먹거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허구한날 같은 주제에 천작하여 연구하고 논문을 써 봐야 아무도 거들떠봐주지 않을 시대가 오리라는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제 반도체 회사들이 cross-talk이 진행되는 수준까지 완전히 도달하고 나면 그 때부터는 공정 혁신보다는 중앙 처리 장치의 구조 ㅡ 아키텍처(architecture)라고 부른다고 알고 있다. ㅡ 를 보다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가 되겠지? 서울대학교에서 미네소타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과제 관련 업무를 진행했을 때 심사에서 탈락했던 참여 과제 중 하나가 뉴로모픽(neuromorphic)한 소자를 만들자는 거였는데 이게 기존의 형태와는 달리 인간의 두뇌를 모사한 새로운 구조라고 한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발전하다가 나중에는 결국 양자 컴퓨팅(quantum computing)의 세계로 전이되어 또다른 혁신이 일어나겠지. 이게 한 10년 전부터 여러 논문의 서론에서 지겹도록 떠들어 대던 미래의 청사진이었는데 진짜 허풍선이의 예측이 아니라 15년 뒤면 현실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빠르게 돌아가는 개선된 성능의 컴퓨터를 보면서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 인간은 이 시간동안 얼만큼 개선이 된 것인가. 우리의 사고, 문화와 사상은 확실히 변화한다. 그것이 진보이든 퇴보이든 주변 환경에 맞게 우리는 집단적인 정신적 얼개를 바꾸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ㅡ 최근 읽었던 책 '호모데우스'의 논의를 빌리자면 ㅡ 유기물이 아닌, 유기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기적인 신호의 발전이다. 컴퓨터를 구성하는 무기물도 놀라운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여 과거와는 천양지차라 불릴 수 있는 정도의 성능 혁신을 일궈냈다. 오직 변변치 않게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은 우리 인류의 구성 성분인 유기물인 것이다. 우리는 결국 엄청나게 진보하고 있는 컴퓨터의 등에 잘 올라탈 것인지, 아니면 이 컴퓨터의 액세서리 부속품이 될 것인지... 본체 안에서 오색빛깔 찬란한 색을 내며 돌고 있는 쿨러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마저 든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
2000년대 초반 네이처 사이언스 논문들 보면 리소그래피 기술이 한계에 도달했다 생각하여 sub micrometer 리소그래피 방식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AFM tip도 이용하고 고분자가 아닌 Molecular glass 등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계의 생각과는 다르게 글로벌 반도체 회사들의 기술은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어 top down 리소그래피로 10 나노 아래로 내려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