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가족을 정읍(井邑)에 있는 풀빌라 리조트인 '엘리스테이(Elystay)'에 데려가고 싶었다. 3년 전이었나, 우연히 이 리조트 1층에 있는 카페 '포레스트 베이(Forest Bay)'에 갔다가, 노출 콘크리트 공법으로 설계된, 각 객실마다 개별적인 기하학적 구조를 갖춘 채 내장산 골프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리조트에 묵으면 여름이 어떨까 궁금해 했더랬다. 사실 원래 이번 8월에는 가족들과 함께 일본의 요나고(米子)를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무더운 날씨와 저조한 패키지 모객률(募客率), 그리고 예상보다 비싸진 경비 때문에 일정을 취소했는데, 나는 이대로 가족 여행이 취소되는 것은 아쉬우니 이 참에 내가 봐 두었던 정읍의 리조트에 가자고 제안했고,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가족들은 내 의견을 순순히 따랐다. 사실 내가 KIST 전북에서 일하니까 가족들이 전북 지역으로 올 기회가 생겼던 것이지, 내가 여기에 일터를 잡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들 인생에 호남 지역에 여행 올 일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게다. 게다가 전주(全州)나 광주(光州)같이 유명한 큰 도시라면 모를까, 정읍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다들 잘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그런 곳에 풀빌라 리조트가 있다고? 가족들이 의아해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래는 3일간 이어진 가족 여행 중 일정별로 남긴 짧은 노트.



- 휴가가 시작된 목요일, 매제(妹弟)의 차를 타고 정읍에 온 가족들을 북면(北面)에 있는 정육식당 '정읍한우'에서 맞이했다. 별다를 게 없어보이는 흔한 정육식당같지만, 이상하게 지역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이는 이 식당의 별미는 한우물회이다. 달달하고 톡 쏘는 겨자 맛이 강하지만 색다른 경험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제일이다. 물론 물회가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육회비빔밥, 보양탕, 설렁탕을 시켜 나누어 먹었다.


- 식사를 마치고 대규모 라벤더 정원이 유명한 카페 '허브원'에 갔다. 물론 라벤더 시즌이 아니었기에 보랏빛 물결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가족들은 마치 유럽 어느 지역의 골짜기를 보는 것 같다며 광활한 규모에 다들 놀라워했다. 커다란 카페 안으로 들어가 '허브원'의 시그니처 메뉴들을 시키고 잠시 더위를 식히는데, 안에서 바라본 바깥의 경치는 언제나 일품이었다. 이곳엔 항상 일요일 점심에 왔던지라 사람들로 엄청 북적이는 공간만을 기억했는데, 손님이 없는 평일 점심 시간은 정말 한가롭고 여유로웠다. 전혀 피아노를 연주해 본 경험이 없을 것만 같았던 한 어르신이 1층 중앙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시는데, 생음악을 배경음악 삼아 커피를 마시는 것도 독특한 경험이었다.


- 이번에 '엘리스테이'에서 묵는 방은 'Royal Suite A'였다. 원래 'Prestige'에서 묵으려고 했으나 옆에서 골프텔 공사 중이었기 때문에 다소 불편할 수 있다는 프론트 데스크의 조언에 따라 조금은 좁아졌지만 그래도 6인이 묵기에 부족하지 않은 'Royal Suite'로 예약했던 것이었다. 복층 구조에 큼지막한 아일랜드 식탁이 있고 ㅡ 버튼을 누르면 멀티탭이 튀어나오는 게 인상적이었다, 거대한 TV를 두고 볼 수 있는 널찍한 소파와 편안한 의자.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발코니와, 비록 투숙 중에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사생활이 보장되는 개인 풀장까지. 의류관리기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6인이 머물며 호캉스를 누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 'Royal Suite'에 묵으면 총 3곳의 다른 풀장(그러나 깊이는 1.4 m로 동일)에서 수영할 수 있다. 'Premier' 객실이 있는 숙박동 최고층에 있는 인피니티 풀, 호텔 중앙에 있는 메인 풀, 그리고 객실에 딸려있는 개인 풀. 우리는 모두 옷을 갈아입은 채 인피니티 풀에 올라가서 첫 수영을 즐겼다. 최고층에서는 내장산과 그 아래 펼쳐진 용산호, 그리고 내장산 골프장이 한 눈에 다 들어왔다. 멋진 산과 호수의 경치를 눈에 담으며 수영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인피니티 풀에서는 풀장 모서리에서 바깥 경치를 바라보는 뒷모습 사진으로 남기는 게 '국룰'이라길래 처음으로 그런 사진을 찍어 보았다.


- 인피니티 풀은 아무래도 좁고 긴 형태이므로 오랜 시간 충분히 수영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조카의 수영 경험을 더 길고 풍성하게 해 주기 위해 메인 풀장으로 내려왔다. 메인 풀장 이용객의 수가 인피니티 풀보다 적었고, 면적도 더 넓었기에 아주 여유롭게 수영을 즐길 수 있었다. 아무 눈치 볼 필요 없이 수영을 하다 보니 자유형과 평영 실력이 조금 는 것 같았다(?). 인피니티 풀과 메인 풀에서 도합 1시간 반 동안 있었다.


- 원래 리조트 내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늑장을 부리다가 라스트 오더 시간(=오후 7시)을 넘겨버리고 말았다. 조카는 오늘 저녁으로 파스타를 먹고 싶다고 했고, 다행히도 내겐 이 황당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음식점을 알고 있었으니, 예전에 예배 끝나고 가 본 적이 있었던 '한옥파스타'였다. 우리는 각자 서로 다른 파스타를 시키고 서로 다른 네 종류의 치즈가 올라간 피자도 하나 추가로 시켰다. 다들 그릇에 한 가득 담겨 나온 파스타의 양에 기겁했고, 파스타 집에서 배가 불러서 맛난 파스타를 다 먹지 못하고 남기는 것은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하나로마트를 들러 속이 노란 블랙망고수박을 샀다. 그리고 숙소를 둘러 본 아버지께서 다음날 저녁은 무조건 삼겹살을 구워 먹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셨기에, 마트를 들른 김에 고기와 된장찌개 재료들, 쌀, 그리고 각종 부속 반찬들을 샀다. 다음날 아침에 먹을 누룽지도 샀다. 한편 어머니께서는 마트 주류 코너에서 발견한 250 mL 짜리 미니 맥주 캔 6개들이 제품을 보시고, 다음엔 이 제품을 인터넷으로 구매해야겠노라고 말씀하셨다.


- 숙소로 돌아와 과일을 먹으면서 개인 정비를 마친 우리 가족들은 조카의 제안에 따라 '서펜티나'라는 간단한 카드 게임을 즐긴 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그런데 내게는 11시도 안 되는 이 시간은 자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에 잠시 TV를 틀고 산불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이내 자리로 들어가 잠을 잤다.


- 둘째날. 8~9시쯤에 일어난 우리는 뜨거운 물을 누룽지에 부은 뒤 김치와 함께 먹어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민간정원을 겸하고 있는 카페 '제이포렛'에 갔다. 예전보다 고양이가 부쩍 많아졌고, 카페 건물이 증축되어 이제는 카페로 들어오지 않고서는 정원을 감상하지 못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기기묘묘한 형태로 가꿔진 나무와 풀들이 좁은 길을 따라 감각적으로 놓인 정원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고, 짐벌을 들고 촬영한 정원 모습을 본 조카는 '이거 유튜브 구독자 10만명은 되겠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 커피를 다 마신 우리는 태인(泰仁)에 있는 피향정(披香亭)에 갔다. 인부 여럿이 이미 이 큰 누정(樓亭) 위에 올라와 벌렁 드러누운 채 더위를 피하고 있었는데,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주보다 기온이 내려갔다고는 하나 여전히 무더운 여름 날씨였는데, 신발을 벗고 누정 안으로 들어오니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게 정말 여기서 낮잠을 자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카에게 피향정 근처를 지나는 '수학정석길'의 유래를 설명해 주려고 했으나, 아직 수학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조카에게 태인 출신의 홍성대 씨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 싶어 관뒀다.


- 더위를 식힌 우리는 시내에 있는 '옛날김밥'에 가서 부침개 김밥과 라볶이를 시켰다. 뭐 그런 김밥이 있냐고 되물었던 가족들은 그릇에 담긴 6,000원짜리 부침개 김밥의 비주얼을 보고 다들 놀랐고, 맛을 보고 괜찮다며 신기해 했다. 이것만 먹기에는 조금 아까워서 백종원과도 관련이 있는 '솜씨만두' 집에 방문해서 군만두와 찐만두를 섞어 사 숙소로 포장해 가져갔다.


- 풀장 개장 시간인 3시가 넘었기에 조카는 매제를 데리고 벌써 메인 풀장으로 나갔고, 나 역시 몇 가지 자잘한 업무를 노트북으로 확인한 뒤 메인 풀장으로 나섰다. 전날 영상으로 내가 수영하는 모습을 찍었는데, 자유형 할 때 오른팔 휘젓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스트로크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수영했다. 이날도 1시간 반 정도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 전날 사 놓았던 돼지고기 삼겹살과 목살을 구워 먹었다. 어머니는 된장국을 끓이셨고, 매제는 전기 그릴에서 고기를 구웠으며, 나는 작년 유럽 출장 갔을 때 사 왔던 코냑(Cognac) 한 병을 따서 모두에게 나누어주었다. 삼겹살은 1 kg, 목살은 0.5 kg였는데, 어른 다섯과 초등학생 1명이 먹기에는 다소 적은 양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후에 샀던 만두를 같이 곁들여 먹으니 그 정도면 배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소란스럽지 않은 발코니에서 여유롭게 고기를 구워 먹으며 코냑을 비우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 밥을 먹은 뒤 조카가 정한 일정에 따라(?) 오델로(othello) 게임을 한 판 했다. 세 귀를 차지한 내 승리. 그리고 아버지의 제안에 따라 밤중에 부자(父子)는 리조트 근처 용산호에 '미르샘'이라고 하는 다리 위를 걸어보았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바닥이 데크로 만들어져 있었다. 중앙 지점에는 여의주 모양의 구체 주변을 돌고 있는 용 조형물이 있었는데, 여의주를 자세히 보니 하단은 단풍, 상단은 구절초 문양이었다. 걱정과는 달리 호수 위는 시원했고, 낮에는 20분 간격으로 분수를 가동한다고 하니 아버지는 다음날 아침에 체크아웃하고 여기를 들렀다 가자고 제안했다.


- 셋째날. 기상 시간은 여전히 8~9시였고, 우리는 어제 먹다 남은 된장국에 밥을 말아 먹는 것으로 아침으로 대신했다. 모든 짐들을 챙기고 체크아웃을 한 뒤, 리조트 1층에 있는 카페 '포레스트 베이'에 가서 소금빵과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어제 아버지의 제안대로 가족들 모두 용산호 미르샘에 갔는데, 마침 도착한 시간에 미르샘 주변에 있던 분수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조카와 나는 잰걸음으로 용 조형물이 있는 미르샘 가운데까지 빠르게 갔는데, 알고보니 용 조형물 입에서 물줄기가 물총처럼 발사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카는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영상과 사진을 찍으면서도 용의 입에서 나오는 물줄기에 옷이 젖는 건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는 여기에 호수 위를 떠다닐 수 있는 배가 있으면 참 좋겠다고 했다.


- 우리는 그대로 정읍에서 완주(完州)로 이동했고, 내가 일하는 곳 근처에 있는 일식당에서 보리굴비 정식을 먹었다. 가족들은 보리굴비가 나오기 전 나온 회와 초밥의 맛에 놀라워했고, 이윽고 대접된 보리굴비의 크기와 녹찻물의 시원함, 그리고 곁들여 먹기 위해 나온 간장에 담긴 멸치가 일품이라며 매우 만족해했다. 보리굴비를 먹기에는 어렸던 조카에게는 연어초밥을 시켜줬는데, 절반을 비우는 기염을 토해 자기 부모를 매우 놀라게 했다.


- 또 커피를 마시기는 좀 애매해서 바로 익산(益山)의 내 집으로 바로 건너왔다. 에어컨을 켜 두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가 조카의 호기심(?)에 못 이겨 우리는 모두 보드게임 모노폴리(monopoly)를 강제로 해야만 했다. 첫 판은 오리지널 한국판. 그리고 두번째 판은 확장팩인 K-청약. 조카는 청약이 뭔지도 모르고, 카드를 집었을 때 무슨 취득세 납부니 다자녀 특별공급이니 ㅡ 조카는 그래서 '선서. 나는 미래에 아이 3명을 가질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외쳤다. ㅡ 이런 말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호기심을 가지고 열심히 플레이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어른도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대한민국 부동산 청약 시장을 반영한 두번째 판에서는 조카가 가장 먼저 파산해서 게임 아웃되었다.


- 저녁 시간이 되어 나는 가족을 이끌고 집 근처에 있는 곱창 맛집으로 향했다. 요즘 집에 방문하는 손님은 무조건 여길 데려가는 편인데, 마침 주말이라 육사시미는 안 되니 육회를 대신 시켰고, 곱창과 막창을 섞어 주문했다. 다들 곱창 안에 곱이 충실하고, 막창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며 신기해했다. 우리는 소주를 시켜 나눠 먹었고, 창자를 다 구워 먹은 뒤 얼큰이 라면을 시켜 싹싹 다 긁어 먹었다. 6인이 먹었음에도 15만원이 안 되게 나온 외식비에 놀란 것은 덤.


- 다음날 아침에 나는 일요일 일정이 있었던 아버지를 익산역에 모셔다 드리고 곧장 감사성찬례에 참석하러 정읍교회로 향했다. 그 사이 나머지 가족들은 집에서 조금 쉬다가 금마(金馬)에 있는 오늘제빵소에 들러 빵과 커피로 배를 채운 뒤 시흥 집으로 향했다.


처음에 계획했던 요나고 여행보다 훨씬 알차면서도 여유로웠던 가족 여행이지 않았나 자평해 본다. 나는 외가 동렬(同列)들에게 이번 여행 영상 몇 개를 공유했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전부 다 같이 오자고 제안했다. 조카 역시 자신들의 사촌들이랑 같이 와서 수영도 하고 게임도 했으면 좋겠다며 또 오자고 얘기했다. 가족끼리 오는 여행은 또 이런 재미와 맛이 있구나, 느낀 귀한 정읍 가족 여행이었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