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는 언젠가 "네가 공부를 잘했으니 망정이지 공부라도 못했으면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을 거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앞뒤 문맥을 고려해서 이 발언을 해석하자면, 본래 남자란 원시 시대에는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먹잇감을 사냥하여 식솔들을 먹여살릴 수 있어야 대접받을 수 있는 존재인데 나는 굉장히 체격적으로나 운동신경 면에서나 뒤떨어지므로 ㅡ 즉, 남자답지 못하므로 ㅡ 옛날에 태어났다면 아주 열등한 종자였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다행히 현대에는 신체적 열위를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등장하여 유전적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나는 그 중에 학업에서 우위를 점해 제대로 대접받는 삶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 뭐 이런 취지의 말씀이셨다 ㅡ 혹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요즘 시대에도 과연 학업 혹은 가방끈이 그러한 밝은 앞날을 보장해주는 증명서로 활용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덧없이 대학을 나와서 인생을 축내는 것보다 기술을 배워서 일찍 돈벌이를 하는 것이 더 현명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과연 실제 돈벌이에는 써먹히지도 않을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말이다. 실제로 고학력자 백수들도 넘쳐나고 박사학위를 가지고서도 변변한 직업을 가지지 못해 길고 긴 박사과정 동안의 수고로운 삶을 후회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나는 왜 학업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현실을 눈여겨 보지 않았으니 그저 진학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현실에 아둔하고 세상 물정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물론 연구자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하지만 그 목표에는 연봉이라든지 직장의 위치라든지 사회적 지위라든지 이런 것에 대한 고려가 없었거나 혹은 불명확했다. 오직 유일하게 직장에 관해서 단 한 가지 내가 고집스럽게 원했던 것은 단지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표현에는 '학업이라는 것은 인생의 무기'라는 신념이 깔려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신체적으로나 혹은 다른 면에서 남들보다 불리하므로 경쟁력 있는 우수한 화력을 갖추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지는 않았다. 그저 새로운 걸 익히고 다른 상황에 끼워 맞춰보고 나서 무언가가 잘 설명되거나 해석되면 그것으로 즐거웠기 때문에 공부를 한 것이었다. 달리 생각해 보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급 취미이자 유희였고, 나는 이 날 이 때까지 계속 그것을 추구한 것뿐이다. 어느새 그 학문이 다루는 내용들은 일상생활과는 무척 동떨어진 것들이 되고 말았지만, 여전히 비슷한 쾌락을 추구한다는 느낌을 늘 받는다. 그러니까 연구는 일종의 유희인 셈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로운 삶으로 이끌어줄지 혹은 머리만 커진 채 당장 한 입의 먹거리를 아쉬워 할 상황으로 나를 몰고 갈지 나는 잘 모르겠다. 주변 친구들은 모두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벌고 가정 계획을 생각하는 요즘, 나는 아직도 배우며 도전하며 계속 그런 유희를 추구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남들이 현실과 부딪히며 살고 있는 와중에 나만 혼자 현실에서 동떨어진 곳에서 순진한 이상을 가지고 순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뭐 내가 즐거워하는 것들이니까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이 맞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긴 한데 이 삶이 과연 지속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과연 '대접받고 살 수 있는' 삶으로 전이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ㅡ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본적도 없고,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당장 내일 NMR을 찍어봐서 어떤 피크가 있고 없는지 확인하는 게 더 중요하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