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비가 퍼붓더니 어제부터 오늘까지 연속 날씨가 좋았다. 선선한 공기를 뚫고 따스한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니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나들이하거나 운동하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 게다가 한국에서 자주 겪었던 미세먼지가 없다보니 가시거리가 굉장히 길었고, 마치 어떤 사람이 미리 깨끗하게 닦아낸 것같은 파란 하늘이 눈앞에 펼쳐지니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아졌다.


원래 토요일은 늦잠을 잘 수 있는 유일한 날이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비교적 이른 시간인 오전 8시에 일어났다. 기억을 더듬어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꿈이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갑자기 무슨 이유에선지 꿈이 여름날 아이스크림 녹는 듯한 그냥 흐물거리는 단색의 영상으로 돌변했고, 이야기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한 나는 그냥 눈을 뜨고 일어났다' 정도였다.


아무튼 토요일치고는 굉장히 일찍 일어난 나는 아침을 챙겨 먹고 빨래를 돌리고 청소를 마쳤다. 오랜만에 아침 일찍 집안일이 끝나자 여유가 생겨서 바로 가방을 챙겨들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돌아왔는데 그랬음에도 정오가 지나지 않았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마트에서 먹거리를 사 왔지만 지금은 해가 저 높이 떠 있는 2시. 워낙 시간이 남다보니 잠깐 낮잠이나 자고 학교를 갈까 고민했지만 이렇게 좋은 날씨에 실험실에 들어가는 것은 영 좋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내린 선택은? 이 좋은 날씨를 벗삼아서 산책이나 하고 따스한 햇볕 아래서 책이나 읽자!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경전철 열차에 몸을 실어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미네하하(Minnehaha) 공원으로 향했다.


미네하하 공원은 미시시피(Mississippi) 강의 지류인 미네하하 천(creek)과 미네하하 폭포를 중심으로 조성된 녹지인데 이날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내려가다보니 드디어 폭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네하하 폭포의 첫인상은 제주도의 천제연 제1폭포와 비슷하다는 느낌이었고, 오랜만에 폭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폭포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시 정부에서 울타리를 쳐 놓은 것 같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가 폭포 근처까지 다가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몇몇 도전 정신 강한 학생들은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 뒤 쪽의 침식된 공간으로 들어가서 폭포를 구경하고 있었다.


공원으로 다시 올라와서 한바퀴 빙 돌아보았다. 가족 단위로 온 사람, 연인 단위로 온 사람, 친구들과 함께 놀러 온 사람 아주 다양했다. 날씨가 좋다보니 돗자리를 깔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도 진짜 옷을 벗고 그냥 잔디밭에 누워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포근하고 편해 보였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놀이터에서나 잔디밭에서나 뛰어다니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원반 던지기를 하며 오후의 한 때를 즐기고 있었다. 강아지들도 자기 세상인 듯 열심히 헐떡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강아지 주인이 강이지를 산책시키는 것인지 강아지가 주인을 산책시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십여분 정도 걷다가 빈 벤치에 앉아 미뤄두었던 책 읽기를 시작했다. 전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로완 윌리엄스(Rowan Williams)의 책인 「Being Christian」. 다음주일에 있을 견진예식을 위해 신부님과 함께 같이 읽으며 토론하던 책이었는데 그간 여유가 없어서 마지막 장인 4장을 읽지 못했다. 따스한 햇볕 아래서 책을 읽다보니 졸음이 몰려와 가끔 집중이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흥미롭게 읽었다. 4장은 기도에 관한 내용으로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었는데, 이와 관련해서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오리게네스(Origen), 동방 교회의 카파도키아 교부 중 하나로 언제나 칭송받는 니사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issa), 그리고 수도사였던 존 카시안(John Cassian)의 사상이 소개되었다. 그렇게 책을 다 읽고 그냥 주변 경치를 둘러보노라니 어느새 저녁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었고, 나는 내리쬐는 태양을 뒤로 한채 여유 있게 경전철을 타고 미니애폴리스 시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물론 오늘 오후에 실험실에 가서 실험을 했어도 뭔가 생산적인 일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날씨를 미니애폴리스에서 누릴 날이 얼마나 되겠는가. 과거에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좋은 날씨의 귀중함'을 요즘 굉장히 많이 곱씹어보게 된다. 과연 1년 중, 아니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이렇게 좋은 날씨들이 얼마나 있을까. 이 화창한 날씨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도 정말 아쉬운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라고 누가 그러던데...) 아무튼 그런 점에서 오늘 학교를 안 가고 미네하하 공원을 간 것은 무척 잘 한 일이다. 후회가 전혀 없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