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버스를 타고 볼티모어(Baltimore)를 거쳐 윌밍턴(Wilmington)에 도착했다. 윌밍턴은 델라웨어(Delaware) 주의 최대 도시인데 그럼에도 인구가 10만이 훨씬 안 된다. 연말연시 연휴인데다가 도시 자체도 작고, 거기에 겹쳐 눈까지 소복히 내린 탓인지 버스에서 내려서 호텔까지 걸어가는데 도시가 정말 조용했다. 심지어 택시를 타고 헤이글리(Hagley) 박물관으로 가는 길조차도 그렇게도 고요할 수가 없었다.


헤이글리 박물관은 과거 윌밍턴에 이주하여 화약 제조 사업을 크게 일궈낸 듀퐁(du Pont) 가문의 옛 화약 공장을 개조하여 조성한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크게 방문객 센터, 노동자 숙소, 화약 및 기계공작소, 그리고 듀퐁 사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날 눈이 내리는 바람에 노동자 숙소와 듀퐁 사택 관람은 제한되었다 ㅡ 그러나 그 덕분에 박물관 관람료가 공짜였다. 방문객 센터는 과거에 화약을 가득 담는데 쓰이는 목조 드럼통(keg)을 제조하는 3층짜리 공장 건물이었는데 박물관 개조 후 1층은 윌밍턴 주변의 역사와 수력을 이용한 제분 산업의 발전, 그리고 듀퐁의 화약 제조업에 대해 소개하는 장소로, 3층은 화학 회사로 거듭난 듀퐁의 다양한 고분자 발명품에 대해 소개하는 장소로 탈바꿈했다. 아무래도 고분자화학을 연구하고 있는 나로서는 3층이 가장 흥미로운 장소였는데 여기만 둘러봐도 듀퐁이 얼마나 대단한 회사인가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0세기에 개발된 고분자 제품이 우리 생활에 얼마나 많은 혁신을 가져왔는지! 여기에 전시된 품목들 ㅡ 예를 들며 나일론(Nylon), 케블라(Kevlar), 라이크라(Lycra) 등등 ㅡ 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교과서에서조차 상품명으로 등장하는 멋진 물질들이다. 고분자화학과 화학공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에 와서 전시품을 관람할 의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관내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가면 강 근처에 화약 및 기계공작소가 있는데 여기서는 당시 수력을 이용하여 기계공작을 어떻게 했는지 시연을 하고, 듀퐁에서 화약이 어떻게 제조했는지 설명한 뒤 실제 화약을 터뜨려 폭발성이 우수하다는 것을 검증하는 실험을 관람객 앞에서 진행하였다. 요즘이야 전기로 모든 동력을 공급받는 세상이지만 200년전만해도 증기기관이 아닐 바에야 가장 원초적인 동력 공급원은 바로 물이었다. 물레방아를 통해 돌아가는 공장 내 주축, 그리고 거기에 연결된 벨트를 통해 힘차게 돌아가는 각종 원통들. 그리고 거기게 연결되면 왕복운종 혹은 원운동을 하며 원하는대로 제품을 가공하는 공작기계들. 중학교 때 기술 시간에 배운 기계 구성 원리 ㅡ 크랭크, 링크, 기어 등등 ㅡ 가 번뜩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무튼 이러한 기계들을 기반으로 하여 초석과 황, 목탄을 일정비율대로 섞어 가공하면 화약이 만들어지는데 듀퐁의 화약은 세상 어느 화약보다도 우수했다고 한다. 듀퐁은 원료의 순도가 제품의 우수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간파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화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순도 높은 원료로 정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전해진다. 듀퐁은 거의 백만 파운드가 넘는 화약을 제조하여 미국 전역에 공급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개인적으로 물어봐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남북 전쟁 당시 북부 연합의 대통령인 에이브러험 링컨은 듀퐁 화약의 우수성을 일찌기 알아 북부에서 듀퐁 화약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도록 각별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북군 무기의 우수성이 담보되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었겠는가.


헤이글리 박물관은 윌밍턴에 남겨진 듀퐁의 자취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인터넷 연결이 불가능해서 굉장히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리고 굉장히 화려하고 거대한 전시품목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듀퐁과 듀퐁의 발명품들이 아기자기하게 잘 전시된 것을 보노라니 여길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오늘은 헤이글리 박물관만 방문하고 모든 일정을 마쳤다. 저녁에 시내에 있는 음식점에수 피맥을 엄청나게 먹어치운 것을 빼면.. 숙소에서 시간을 다 보냈다. 오랜만에 혼자 방을 사용하니 어찌나 편하던지 ㅡ 반신욕도 하고 옷도 제대로 안 입은 채 침대에 누워 TV를 보았다. 아이고 편해라. 내일 아침까지만 호사를 누리고 이제 다시 여행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겠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