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성찬례를 마친 뒤 식료품점에 들러 먹거리를 좀 사고 집에 돌아와서 한껏 점심을 배불리 먹은 뒤 다시 길을 재촉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로 트윈 시티 윈터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Crooner Lounge & Supper Club 이라는 라운지 바 겸 레스토랑. 원래 트윈 시티 재즈 페스티벌은 매년 여름에 세인트폴(St. Paul)에서 열리는데, 그 전에 잠깐 재즈에 대한 시민의 열의를 꺼뜨리지 않기 위한 목적인지 모르겠으나 겨울에도 오늘같은 당일치기 짧은 음악 이벤트가 있었다. 이 공고를 처음 봤을 때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덜컥 티켓을 구매했는데, 이 페스티벌 장소가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가야하는, 생각보다 먼 곳에 있는 음식점이었다. 대략 13 km 정도 떨어져있으니 예전 안양집에서 녹두거리 정도라고 생각하면 딱 적당할 것 같다.


그렇게 집을 나선 뒤 TCF 뱅크 스타디움에서 2번 버스를 탄 뒤 종착지에 내려 10번 버스를 기다렸는데, 하필이면 먼저 도착한 버스가 10N이 아닌 10H라서 10H의 종착지인 타겟 센터에서 내려야했다 ㅡ 참고로 트윈 시티 버스들은 노선을 공유하되 종착지가 서로 다른 버스들을 숫자 뒤의 알파벳으로 구분한다. 재미있게도 오랜만에 버스를 수십분 타다보니 한국에서의 습관(?)대로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런데 타겟 센터에 내려서 10N으로 갈아타려고 하니 1시간에 한 대씩 오는 이 버스는 30분 뒤에야 정류장에 도착한다네? 결국 근처의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 홀짝 마시고 잠시 몸을 녹인 뒤에 정류장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고, 놀랍게도 예정된 시각 근처에 10N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약속 시간을 제때 지키는 트윈 시티 메트로 서비스에 찬사를 보내며 버스에 올라탔고 결국 목적지인 Crooner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재즈 페스티벌은 공식적으로는 오후 1시부터 밤 8시 반까지 진행되는 것이었으므로 내가 라운지에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재즈 센트럴(Jazz Central)이라는 섹스텟(sextet) 밴드 하나가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드럼, 피아노, 베이스가 리듬 섹션을, 그리고 색소폰, 트럼펫, 트럼본이 멜로디 섹션을 나눠가지고 있었는데 드러머와 피아니스트가 부자(父子)지간이라는 굉장히 독특한 밴드였다. 더구나 성(姓)이 산티아고(Santiago)라는 것도 독특했고...


1시간여 진행된 이들의 공연이 마무리되고 건너편에 마련된 또다른 공연 장소인 Dunsmore Room에 갔는데 거기에서는 굉장히 독특한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피아니스트인 제이비어 데이비스(Xavier Davis)와 바이올리니스트인 레지나 카터(Regina Carter)의 듀오 공연이었는데, 이때까지 많은 재즈 공연을 봐 왔지만 피아노와 바이올린 재즈 듀오 공연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압권(壓卷)이었다. 그동안 바이올린은 음색과 연주 기법의 특성상 재즈 음악과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악기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편견을 산산히 부숴뜨린 멋진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레지나 카터에게 짤막하게 감상을 이야기했더니 참으로 고마운 말을 해 주었다며 미소를 한껏 지어주셨다.


다시 라운지로 돌아오니 주디 비나(Judi Vinar)라는 여성 보컬리스트와 더 울버린스(The Wolverines)라는 밴드가 공연을 막 시작했다. 바에서 스텔라 아르투아 생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공연을 듣는데 이 밴드는 아까 밴드보다는 흥이 겨운 밴드였다. 여장을 한 남성 드러머가 굉장히 격정적으로 연주하고 있었고, 보컬리스트는 참신한 스캣 아이디어를 선보이며 귀를 사로잡았다. 많은 이들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벌써 마지막 팀의 공연 시간. 이날 라운지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책임질 팀은 ACME 재즈 컴퍼니라는 빅밴드였다. 원래 이들과 협연할 예정이었던 유명한 드러머인 버치 마일스(Butch Miles)가 독감으로 인해 불참하는 바람에 약간 맥이 풀린 느낌이긴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들은 자신들의 스타일대로 아주 다양한 곡들을 연주하며 관객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스윙에서부터 대중가요 [이를테면 베사메 무초(Besame mucho)같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선곡으로 이날 관객 주 연령층이었던 노년층의 마음과 귀를 사로잡은 듯했다. 우리 80대 할아버지 세대에게 '황성옛터' 이런 노래를 들려드릴 때도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빅밴드 공연은 웬만해선 실패할 일이 없다!


어느새 밖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저녁을 다 먹고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7시 40분. 공연이 완전히 끝나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제 때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하지 못하면 이 지역에서 출발해서 미니애폴리스로 가는 10번 버스가 1시간에 한 대씩 운행하기 때문에 1시간이나 하릴없이 밖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려야 하는 불상사를 겪을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아쉬움을 뒤로한 채 7시 50분경에 빅밴드의 공연이 아직 한창인 라운지를 떠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버스는 예정된 시각인 밤 8시 7분에 정확히 정류장에 도착했고, 나는 미니애폴리스 시내에서 내린 뒤 경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요즘 거의 매달 한 번씩은 꼭 재즈 공연을 보는 것 같은데 참 좋다. 미국이 한국보다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재즈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다는 점이다. 잘 돌이켜보면 미국에서 지내서 좋은 점이 몇 가지 있기는 하겠지만, 그 앞에 '뭐, 미국이니까.'를 붙이면 그 장점들이 '그냥 그렇고 그런' 별 거 아닌 것들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재즈만큼은 다르다. 재즈 음악이 소수 마니아의 취향이고, 재즈클럽이 2-30대 연인들의 분위기 잡기 위해 가는 곳쯤으로 인식되는 한국에 비하면 미국의 재즈는 역사와 저변도 넓고 무엇보다 남녀노소 누구나 이이 음악을 진지하게 즐기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미국이 아무리 재즈의 탄생지라고는 하지만, 그래서 재즈가 당연히 미국의 보물과도 같은 것은 당연한 얘기지만, 이것만큼은 정말 부럽고 샘나고 안타깝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