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회째를 맞이하는 미국 화학회 (American Chemical Society, ACS) 가을 미팅이 열리는 장소는 다름 아닌 보스턴(Boston)이었다. 벌써 이번이 다섯번째 방문. 월요일에 비행기를 타고 보스턴의 로건(Logan) 국제 공항에 내렸는데 뭐 누가 알려줄 필요도 없이 스스럼 없이 밖으로 나가 실버 라인을 타고 사우스 역(South Station)에 내려서 캐리어를 질질 끌며 호텔로 향했다. 지도를 안 봐도 대충 이 길로 가면 뭐가 나오겠거니 싶었는데 정말 그대로 뭐가 나오니까 새삼 놀랐다 ― 정말 보스턴은 이렇게나 친숙한 도시가 되어버렸구나 싶은 느낌이 들면서.


수요일, 그러니까 어제 ACS에서 처음으로 구두 발표(oral presentation)를 진행했다. 국제 학회 첫 구두 발표는 작년 미국 화학공학회(American Institute of Chemical Engineers, AIChE)에서 하긴 했지만, ACS에서 발표를 한다는 것은 나름 뜻깊은 일이다. 왜냐하면 내 본향(?)은 어쨌든 화학공학이 아닌 화학이니까. 화학 관련 학회 치고 가장 국제적이고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방문하는 ACS에서 연구 결과를 선보인다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AIChE서는 15분 발표였는데 ACS는 그보다 5분 긴 20분 발표라서 조금 더 여유롭게 발표를 진행할 수 있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세션 자체가 general topic이었던지라 발표를 진행할 때 청중으로 있던 사람들 중 내가 진행한 연구에 관심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워낙 다양한 화학 연구 배경을 가진 사람이 모이는 ACS에서는 공통의 관심사로 많은 사람들이 묶이기가 굉장히 힘든 것이 사실이다. 유기화학이나 물리화학같이 다른 분야에서 확고하게 입지를 굳힌 저명한 연구자들의 강연을 듣고 그들의 비전을 들여다보기에는 더할나위없이 좋은 학회임에는 틀림없으나 내가 관심있어하는 분야 자체에 대한 심도 있는 교류를 진행하기에는 ― 고분자화학을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 미국 재료화학회(Materials Research Society, MRS)나 미국 물리학회(American Physical Society, APS) 비하면 다소 어려움이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2011년 콜로라도 덴버(Denver)에서 열린 ACS 학회 이후로는 약 7년간 ACS에 등록하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대학원 박사과정 시절 처음으로 참석한 국제학회가 ACS였고, 그때 처음 방문한 미국 도시가 바로 이곳 보스턴이었으며 학회가 열리는 장소도 현재와 동일한 보스턴 컨벤션 센터(Boston Convention & Exhibition Center, BCEC)였다. 그게 2010년 8월이었는데 이곳 사진첩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참 그때는 처음 온 미국도시의 정취를 느낀답시고 학회 일정이 끝나면 미친듯이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댔다 ― 요즘은 여행을 가도 사람이 없는 건물이나 풍경 사진은 절대 찍지 않지만 말읻이다. 8년전의 나는 미국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서양인들이 돌아다니는 이 대학도시가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졌고, 또 포스터 발표를 그런 국제 규모의 학회에서 진행한다는 것이 매우 큰 경험이자 영광이라고 인식했다. 신식 건물로 이전하기 전의 낡은 호스텔링 인터내셔널(Hosteling International)에서 싼값에 주고 머문 4인실 방에서 소음이 심한 에어컨 소리에 짜증을 내며 시차 적응에 실패한 것을 한탄했던 것이 생각나고, 당시 갓 구매했던 스마트폰인 넥서스원(Nexus One)에 번들 이어폰을 꽂고 야경이 멋진 크리스천 사이언스 플라자(Christian Science Plaza)를 걸으며 (정말 뜬금없지만) 샤이니의 '루시퍼' 노래를 들었던 게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은근히 사람의 기억은 동시에 경험된 오감과 함께 각인되어 있는 경우가 참 많다. 이 노래를 들으면 보스턴이 생각나는 걸 보면....)


지금은 어떤가. 8년후인 지금의 나는 이미 미국에서 2년을 지낸 박사후연구원이다. 넥서스원보다 훨씬 진일보한 갤럭시 S6를 들고 별 거리낌없이 이 (전혀 낯설 리 없는) 미국 도시를 휘젓고 다니고 있다. 학회 장소에서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주고 받을 사람이 지도교수님 말고 더 생겼는데 심지어는 마인츠 대학을 졸업한 내 독일 친구와 함께 연구를 진행했다는 박사과정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세상 참 좁다고 서로 웃으며 말했다. 학회에서 열리는 강연들이 '어차피 논문으로 다 나온 얘기들 재탕하는 거라서 신선도가 떨어진다.'라고 평할 정도로 학회에 대한 인상이이 굉장히 달라졌으며, 이제 국제 학회에 참석한다는 것이 내 연구 커리어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숙고(?)해 보는 단계에 이르렀다. 더이상 다인실 도미토리에서 잠을 청하지 않고 1인실 호텔방에서 머물며 영화 한 편을 주문해서 감상한다. 그리고 푸드코트의 싼 음식을 찾아 헤매지 않고 그냥 먹고 싶은 것을 찾아 돈이 얼마가 나오든 상관없이 주문을 한다. 이번에 보스턴에 처음 온 서울대 박사과정 연구실의 후배를 만나서 밥을 사줬는데 그 학생의 일정과 계획 얘기를 듣고 보니 '아, 정말 나도 저땐 저랬지' 싶어서 참 기분이 묘했다.


이 수미쌍관(首尾雙關)과도 같은 보스턴 학회의 처음과 마지막을 반추(反芻)해보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고, 참으로 많은 일들이 나를 성장시켰으며, 참으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개인적으로 박사후연구원과정은 박사과정 연장선상에 있는 전이(轉移) 단계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박사후연구원과정과 박사과정을 모두 묶어 이를 만한 어떤 단계 ― 이를테면 연구원 시절? ― 의 마지막을 살고 있는 요즘, 보스턴에서 열린 ACS 학회는 그 모든 경험들을 찬찬히 돌아보며 픽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