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아닌 방문인 까닭은 캐나다 및 볼티모어행의 주목적이 관광이 아닌 사람 만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이모와 함께 미니애폴리스로 돌아와 이틀밤을 보낸 뒤 8월 28일 오전에 우린 모두 수퍼셔틀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고, 거기서 아침을 맏은 뒤 먼저 작별인사를 드리고 캘거리(Calgary)행 비행기 탑승구로 걸음을 옮겼다. 대기 중에 탑승구에 있던 델타(Delta) 항공사 직원은 내가 편도 티켓만 가진 것을 확인하고 나를 데스크로 불러 이것저것을 물었다. 네, 동아오는 비행편은 에어 캐나다(Air Canada)이고 캐나다 전자 여행 허가(eTA)도 이미 2년 전에 발급받았답니다. 직원은 안심한 눈빛으로 나를 대기 좌석으로 돌려보냈다.


8월 28일. 그렇게 도착한 캘거리 국제공항에는 입국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예상보다 30분은 늦어진 것 같다. 마침 입국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가영이를 보게 되었고 우리는 거의 5년만에 봄에도 불구하고 지난달에 본 사람인양 반갑게 인사하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우린 점심을 먹었고, 시내를 돌아다녔고, 캘거리 타워 위로 올라가 와인과 함께 근사한 저녁을 먹었다. 몇년 전만해도 안양일번가 어딘가 커피샵에서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며 웅얼거리던 우리들이 꽤나 잘 컸다고 스스로를 치하하는 웃음과 함께 말이다. 캘거리 타워에서 바라본 도심의 모습은 평온하고도 아름다워 보였다. 가영이의 설명에 따르면 캘거리는 석유가 나오는 앨버타(Alberta) 주의 최대도시인데 한창의 석유 붐으로 급성장을 이룬 도시라고 그랬다. 그런데 모든 명(明)에는 암(暗)도 있는 법 ― 도심 곳곳에 지어지는 고층 주거용(!) 빌딩을 가리키며 가영이는 이곳에도 중국 자본이 유입되어 임대료가 치솟고 있더라는 말을 해 주었다. 문제는 한창 붐이 일어나던 시기와 견주어 보면 폭락한 거나 다름 없는 현재 유가 상황에서는 경제가 침체되어 정작 건축물들이 텅텅 비어있다나. (참고로 이런 상황은 토론토나 밴쿠버와 같은 캐나다 대도시에거 왕왕 목격되는 현재진행형 비극이었다.)


함께 열심히 캘거리를 돌아다니고 하루를 가영이 집에서 묵은 뒤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8월 29일. 이번에는 에어 캐나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캐나다 최대의 도시 토론토(Toronto). 토론토 피어슨 공항은 항상 환승용이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UP라라고 부르는 공항철도를 타고 토론토 중심가에 있는 유니언(Union) 역으로 향했고, 지금까지 경험한 호스텔링 인터네셔널(Hosteling International, HI) 호스텔 중 역대 최악이었던 토론토의 HI 호스텔에 체크인 한 뒤 St. George 역에 갔다. 서울대에서 함께 그래핀 패터닝 연구를 진행했던 홍병희 교수님 연구실의 박명진 박사님을 만나서 맛있는 햄버거와 맥주를 함께 하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사과정 때 진행한 일들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일 ― 그러나 출판 시기가 늦어져서 사람들의 관심이 안타깝게도 서늘한 그런 일이 되어버렸다. ― 을 함께 했던지라 명진이 형에 대한 기억은 남다르다. 해외에 진출한 포닥의 고충, 캐나다 생활의 좋은 점과 나쁜 점, 그리고 결혼 생활 등등 시간이 훌쩍 날아감을 느끼지도 못한 그런 즐거운 대화의 시간이었다.


그 다음날인 8월 30일. 오전에는 토론토에 있는 하키 명예의 전당(Hockey Hall of Fame)에 가서 아이스하키가 거의 국기(國技)로 여겨지는 캐나다의 하키를 향한 열정을 체험할 수 있었다. NHL 및 IIHF 관련 역사와 기록, 그리고 웨인 그레츠키(Wayne Gretzky)와 같은 역대 유명한 하키 선수의 이력과 그들이 사용했던 장비들이 전시되어 있어 하키 팬들에게는 꽤나 흥미로운 장소였다. 게다가 실제 스탠리 컵(Stanley Cup) 및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고 역대 수상자들 목록 및 다채로운 볼거리가 가득했다. 돌아오는 길에 기념품점에 들러 조카 희준이를 위한 어린이용 하키 저지를 하나 구매했다. 물론 토론토니까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Maple Leafs) 팀 저지로...


하키 명예의 전당에 들른 뒤 곧바로 토론토 대학으로 가서 이곳에서 포닥 생활을 하고 있는 Ana Fokina를 만났다. Ana는 한독 교류프로그램인 International Research Training Group (IRTG)를 통해 만난 독일측 연구원 중 하나였는데 마인츠(Mainz)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에 자주 한국을 오가면서 서울대의 차국헌 교수님 방에서 몇 달씩 일했었다. 자연스럽게 IRTG 미팅 및 심포지엄을 계기로 자주 만나면서 이야기하고 놀고 그랬는데 이번에 기회가 되어 토론토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Ana는 반갑게 맞이해주었고, 햄버거 점심을 시작으로 토론토의 이곳저곳을 함께 오후 내내 돌아다녔다. 캐나다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팀 호튼스(Tim Hortons)에 가서 커피와 팀빗(Timbit)도 사서 먹었다. Ana와 나는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지낼 것인지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다. 특히 Ana는 결혼을 앞두고 있고 여러가지로 고려해야 할 일들이 나보다 훨씬 많은데 유럽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캐나다와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다소 신선했다.


그렇게 모든 캐나다 일정을 마치고 미니애폴리스로 돌아왔다. 토론토 공항 직원은 내 J비자 스탬프 만료일이 8월 31일인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니 하루밖에 안 남았는데 미국에 들어간다고?'라고 물어봤지만 나는 괜찮을 거라고 얘기하고 표를 냉큼 받아들고 입국심사대로 향했다. 말은 자신만만하게 했지만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아니나다를까, 이런 케이스를 처음 접해보는 첫 심사관은 내 입국심사 진행을 포기하고 내가 다른 선임 심사관에게 심사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었다. 순간 조금 뜨끔했는데, 다행히도 내 경우가 모든 비자 및 입국 관련 조항에 어긋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입국 허가를 받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집에서 편히 쉬고 나서 일어난 8월 31일. 이날 하루는 미니애폴리스에 머물면서 9월 11일까지 연장된 계약에 따라 DS-2019 서류를 갱신하고 고용 및 그에 따른 세금 관련 서류인 I-9 서류 작성 및 갱신을 진행했다. 고작 열하루 계약을 늘리는 일로 이 모든 수고로움을 감내한다는 게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보험의 혜택을 받으며 일을 마무리하라는 지도교수님의 성은(盛恩)으로 감사하게 여기기로 했다.


그리고 9월 1일. 다시 비행기를 타고 이번에는 미 동부의 볼티모어(Baltimore)에 도착했다. 최근 존스 홉킨스 대학(Johns Hopkins University)에서 포닥 생활을 시작한 대학동기 류태호 박사가 나를 안아주며 반갑게 맞이했다. 태호는 같은 화학부 학사학위를 받았지만 물리학과로 진학해서 뉴욕 주립대 스토니브룩(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Stony Brook)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최근에 볼티모어에서 새로운 연구 생활을 시작했다. 볼티모어는 굉장히 덥고 습했는데, 태호는 이런 식으로 볼티모어가 기억되서는 곤란하다며 연신 난감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먼저 메릴랜드(Maryland) 주의 주도(州都)인 아나폴리스(Annapolis)의 음식점에서 점심을 거뜬하게 먹고 켄트(Kent) 섬으로 향하는 유명한 베이 브릿지(Bay Bridge) 위를 달리며 멋진 바다를 감상했다. 잠깐 내려 주변을 관망할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는 것이 유일하게 아쉬웠다.


아나폴리스에서 볼티모어로 돌아와서는 존스 홉킨스 대학을 죽 돌아보았고, 특이하지만 비건(Vegan) 카페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태호와는 여행 내내 굉장히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야기의 주제는 굉장히 남달랐다. 대개 동기라 하더라도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연히 대화의 주제는 굉장히 신변잡기적인 것들로 흘러가기 마련인데 태호와의 대화는 굉장히 학구적(學究的) 측면에 강했다. 예를 들면 그가 내게 한 질문 중에는 '10년 뒤의 비전이 무엇인가'하는 것도 있었는데 이런 질문은 웬만한 비슷한 나이 또래의 친구로부터 듣기에는 굉장히 현학적인, 그러나 심중을 파고드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학술토론만 진행한 것은 아니었고 최근 동기들의 소식, 돌아가는 미국과 한국 정세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탁자 뒤쪽에서 바삐 돌아가는 컴퓨터 속 계산 진행상황을 보여주며 ― 태호가 진행하는 일은 천체물리학(天體物理學, astrophysics)으로 이론을 통해 세운 모델을 통해 우주 현상을 컴퓨터 계산을 통해 해석하는 것이다. ― 간단하게 그가 진행하는 연구의 방향을 설명해 주었다. 물론 내가 진행했던, 그리고 앞으로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연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9월 2일. 학계에 있으면 언젠가는 무리 없이 보리라는 인사와 함께 볼티모어-워싱턴 공항에서 태호와 함께 헤어진 나는 텅텅 빈 공항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미니애폴리스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지난 며칠간을 돌이켜보니 마치 비즈니스맨처럼 북미 이곳저곳을 비행기로 오가며 바쁘게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서로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르게 살고있는 사람들. 이들과의 대화를 위해 소모한 돈과 시간은 결코 적지 않으나 그 대화를 통해 얻은 기쁨과 정(情)은 그 지출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언젠가는 이들을 또 보겠지, 모두의 건승과 행복한 미래를 기원하며!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