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울산과학기술대학교(UNIST)와 맨체스터 대학(University of Manchester)과 함께 진행한 연구가 한 고개를 넘어섰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던 24일 오후에 Nature Communications誌 편집자로부터 메일이 왔고 투고된 논문이 게재 승인되었다는 소식! 영국 사람들은 성탄절을 전후해서는 일을 전혀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도 Nature Communications 투고 시스템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쓰여있다.


The editorial office will be working an abbreviated schedule from Friday 21 December to Wednesday 2 January in observance of the Christmas and New Year Public Holidays. Please expect longer than usual processing times during this period.


(편집부는 12월 21일부터 1월 2일까지 성탄 및 신년 연휴 관계로 단축 근무를 합니다. 이 기간에는 평소보다 처리 시간이 다소 길어질 수 있음을 유념해 주세요.)


그랬는데, 출판 소식을 24일에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언젠가 여기서 이 논문에 관한 이야기를 작성한 적이 있지만, 그래도 다시 언급하자면... 이 일은 박사학위를 받고 손병혁 교수님 연구실에서 포닥을 막 시작했을 때 시작되었다. 당시 UNIST의 신현석 교수님 연구 그룹에서는 ACS Nano라는 나노과학 전문 저널에 'Catalytic Conversion of Hexagonal Boron Nitride to Graphene for In-Plane Heterostructures'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고, 이 논문을 읽은 나는 몇 가지를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이 일이 내가 가진 기술과 잘 결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룹 미팅 시간에 내 의견을 개진했고, 교수님의 허락 하에 UNIST의 해당 논문 제1저자 박사과정 학생에게 연락하여 공동 연구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이 일이 굉장히 느리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역시나 다른 연구 그룹, 특히 지역적으로도 다소 떨어져 있는 ― 서울과 울산은 비록 '울'을 공유한다해도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동네... ― 대학에 위치한 그룹끼리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결과가 가시화되면서부터는 연구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했고 위 논문에서 언급했던 질화붕소(boron nitride)의 그래핀(graphene) 전환이 국소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창 샘플을 공급해야 할 시기인 2016년 8월에 내가 미네소타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안정적인 연구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험실 후배였던 종혁이에게 뒷일을 부탁하였다. 종혁이가 참 고맙게도 성실하게 여러 샘플들을 지속적으로 UNIST에 공급함으로써 연구 진행에는 무리가 없었다.


이 시기에서부터는 이미 맨체스터 대학에서 그래핀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바 있는 노보숄로프(Новосёлов, 영어로는 Novoselov 라고 적다보니 일반적으로 '노보셀로브'라고 부르는 듯) 교수진과 공동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4년전에 맨체스터에 갔을 때 그곳은 이미 수직 적층 이종구조(heterostructure)를 만드는 데 아주 특화된 설비를 갖추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었는데, 이 맨체스터 대학의 기술이 서울대-UNIST간의 연구 결과에 접목되니 다른 연구진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특별한 구조를 만들어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구조로부터 발견되는 물리학적 특성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또 이를 남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실험을 설계하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2018년 4월에 완성된 초안을 읽어보고 나는 '이건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게 아닌데...' 하고 뇌까릴 정도로 일이 굉장히 거대한 프로젝트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서울대에서 맡은 몫이 한 30%, UNIST에서 맡은 몫이 70% 정도가 되는 논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결과 데이터를 받아보니 맨체스터 대학에서 맡은 몫이 거의 70% 정도가 되면서 전체 논문에서 서울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현저하게 낮아진 것처럼 보였다. 내가 써서 보낸 글은 전체 논문 중에서 정말 일부에 불과했다. 그래도 맨체스터 대학과 UNIST에서는 처음 연구를 제안하고 샘플을 제공하여 협업을 성공시킨 내 역할에 기여도가 굉장하다는 것을 인정해 주어 처음 투고 때부터 계속 제2저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논문은 최근까지 총 3번의 수정을 거쳤 거듭 투고되었다. 4월에 투고 - 7월에 재투고(A) - 11월에 재투고(B) - 12월에 수정(C). 요즘은 재투고(再投稿, resubmission)과 대폭 수정(major revision) 사이의 경계가 좀 희미하게 느껴지지만, 아무튼 거의 반년 이상이 걸려서야 최종 수정 C버전이 결국 게재 승인되었다. 이 최종 버전은 더욱 난해해졌는데, 이는 논문을 심사하는 평가자들이 서울대와 UNIST가 진행한 실험 기법이나 연구 결과보다는 집중적으로 맨체스터 대학에서 진행한 물리학적 이동 특성(transport property) 평가와 관련된 질문을 수두룩하게 하는 바람에 해당 내용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여 논문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그 부분의 서술과 논증이 더 심도있게 길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물리학을 학부 때 전공했고, 또 대학원 박사과정 때 그래핀의 이동 특성에 대해 몇 번 이해해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어서 '아, 이 분들이 이런 것을 주장하고자 했구나.'하는 것을 더듬어 알 수는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심오한 물리학적 성찰과 본질을 꿰뚫어보기에는 영 공력이 부족했다.


어쨌든, 이번 논문 발표를 통해 내 이력서에도 좋은 논문이 하나 출판 목록에 올라가게 되었고, 내 대신 실험을 계속 진행한 종혁이에게도 좋은 경험을 선물해 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무엇보다도 내 박사 지도교수님이 이 논문 연구를 지도한 자격으로 처음으로 Nature 자매지 교신 저자로 이름을 올리셨다! 사실 이게 이제 교수님께 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긴 하지만, 그래도 제자로서 해드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에 하나를 해드렸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시기에 들려온 희소식. 이제 더 이상 그래핀 관련된 깊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 않으니 더 이상 그래핀 패터닝과 관련된 연구 논문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사과정동안 진행했던 이 그래핀 연구의 결과물들은 언제까지나 '그래도 성수는 연구를 해본 경험이 있는 애니까 다른 주제의 연구도 언젠가는 해낼 수 있을 거야.' 라고 보증해줄 터이니... 그 박사과정동안 시간과 마음을 쏟았던 것이 보상받는 것 같아서 어깨가 조금 으쓱해진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