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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을 이렇게 둘로 나눈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아버지에게 있다. 전반부는 아버지가 굉장히 공을 들였고, 후반부는 별 신경도 안 썼기 때문. 물론 내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는 그저 중년 남성들이 올린 돌로미티(Dolomiti) 관련 유튜브 영상이나 몇 개 보고 수행한 소위 '랜선 여행'을 통해 접한 정보를 읊조리는 것이 불과했으므로 그닥 여행에 공을 들였다고 생각해주기는 무척 싫으나, 뭐 그것도 노력은 노력이니 인정은 해 주어야겠다. 아무튼 베로나(Verona)에서 피렌체로 향하는 고속 열차를 타기 전부터 "난 이제 할 거 다 했다. 이제는 뭐 두오모 몇 개랑 피사만 가면 나머지는 신경도 안 쓴다." 이런 망언(?)을 늘어놓으시는만큼, 오늘부터는 진짜 별 기대를 안 하는 눈치이다. 그 말은 무엇이냐? 내가 여행을 좀 편안히 즐길 여유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여행이 이렇게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내 스트레스 지수도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다. 내 가민(Garmin) 시계가 측정하는 HRV도 어제를 기점으로 다시 회복되는 중이다. 사실 보첸/볼차노(Bozen/Bolzano)에 도착했을 때 최고조에 이르렀던 부자(父子)의 갈등은 암묵적인 합의를 통해 나날이 완화되었다. 물론 그 과정 중에 내 신체가 불의의 폭행(?)을 당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폭력을 되갚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 갈등 해결의 비결은... 바로 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나도 한 가지 느낀 바가 있는데, 가족이라고 해서 넘지 말아야 할 인간 관계의 선을 넘나드는 것은 안 되는 것이 맞다. 우리는 지금까지 부단히 서로의 잘못과 부족함을 지적질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말을 일방적으로 내뱉곤 했다. 그런데 그런 말, 사실 밖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감히 하지 못한다. 왜 가족에게는 그런 말이 쉽게 나오는가? 가족이라서? 가족이 뭔데? 가족이라고 모든 게 다 허용되는 것인가? 사실 아니지 않은가? 나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굳이 드러내기 싫은 내 삶이 있고, 그분들이 뭐라 하더라도 절대 안 바꿀 나만의 철학이 있다. 그렇게 치면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그런 '자신만의 영역'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선을 뭐 그리 어렵지 않게 넘어다니며 훈계질을 했던 것일까?
그래서 되도록이면 아버지의 언동에 크게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시라. 말하고 싶으면 말하시라. 하지만 나의 반응은 '음음'에서 그쳤다. 나는 이번에 정확히 깨달은 것이, 아버지는 내 반응 따위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분은 나만큼이나 자의식이 충만한 분이라서 내가 무슨 생각, 내가 무슨 감정을 가지는 지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더하는 게 오히려 내 손해였다. 아버지가 바란 건, "역시 아버지 최고, 당신 말이 다 옳습니다."라는, 검증 없는 무조건적인 찬양이었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이렇게 대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정말 괴롭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는데, 그게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거라면, 그리고 내가 덜 스트레스를 받는 거라면 그렇게 행동하는 게 맞다는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솔직히 맘에 드는 구석이 정말 하나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생각보다 아버지가 정말 퇴행(退行)을 심각하게 겪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어 굉장히 마음이 아프지만, 그분의 최선을 위해서는 내가 최악을 경험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 바로 요 며칠 전의 일이었다.
이런 갈등의 원인도 실은 돌로미티를 돌아보는 여행 전반부에 아버지가 '뭔가를 보여주려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했던 탓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여행 중에 하신 말의 70% 정도는 근거가 없거나 명백히 틀린 것들이었다. 며칠 전까지는 하나하나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명확히 집어주고자 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반응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부터는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는다. 이제 여행 후반부에는 아버지도 '뭔가를 보여주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나도 뭘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우리의 여행은 결국 마지막날 '심히 좋았더라'라고 끝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행이 좋았는가? 사실 최악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좋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최악을 경험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어제 문득 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나 기대가 전부 사라져버린 여행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저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그리고 그를 닮은 탓에 똑같은 이유로 남을 정서적으로 힘들게 만들 나의 모습을 직시(直視)하게 된 소중한 기회였다는 점에서 나는 이 여행을 가능하게 해 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무척 감사하다.
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이번 기회를 통해 재정의하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리고 귀국해서 어머니를 보면 정말 꼭 끌어안아드릴 것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