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인간에게 불을 가르쳐 준 것에 대한 형벌로 결박된 채 매일 독수리에게 간이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 쪼아 먹힌 간은 밤새 회복되었고,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매일 반복되었다.


10월 1일부터 10월 13일까지, 아버지와 지근거리에서 숙식을 같이 한 여행을 통해 느낀 감정은 내가 아버지를 참 몰랐다는 놀라움, 그리고 아버지의 언동(言動)을 이해할 수 없다는 당혹스러움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버지가 이런 분이셨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스트레스가 치솟으며 뭐라고 항의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치받기도 했다. 하지만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흐지부지된 부자 간 긴장 관계는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어설프게 초기화되어 있었고,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이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하지만 스트레스는 어김없이 다시 쌓였고, 각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신경질적으로 굴곤 했다.


백설공주의 계모는 과연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서 거울에게 물어 보았을까? 오히려 계모야말로 백설공주가 자신보다 여러 면에서 우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거울의 비친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에서 백설공주보다 못한 결점을 더욱 또렷하게 보았고, 그 때문에 분노를 삭이지 못했으리라. 자기혐오를 가진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직시(直視)하는 일은 그래서 잔인한 일이다.


왜 그렇게 아버지의 언동에 화가 나는지 곱씹어보면 그게 꼭 내가 누군가에게 했을 법한 언동인 것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ㅡ 남이 원하지도 않는 정보는 뭘 그리 주절주절 얘기하는지,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 회피하고자 하는 그 쪼잔한 마음씨라든지, 고집은 세고 남의 의견은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든지. 내 주변 사람에게 내가 여행 중에 겪은 고통을 조금씩이라도 자꾸 겪게 한 것 같아서 크게 마음이 쓰였다 ㅡ 그래서 여행 중에 친구들에게 날 받아주고 지금까지 잘 지내줘서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즉, 내가 싫어하는 아버지의 언동에서 나 자신의 언동이 반영되어 보일 때 느껴지는 절망감이 여행 중에 나를 크게 좌절하게 했던 큰 요인이었다.


이것은 가족 간의 사랑을 지나치게 절대화하는 데에서 시작해요. 이것을 '가족신화(Family myth)'라고 해요. 가족 전체가 공유하는 허구의 믿음을 의미해요... (중략) ... 하지만 슬프게도, 이상은 그저 이상일뿐이에요. 이상은 현실이 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병을 앓는다 中)


나는 가족이라면 대체로 동조(同調)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가정 내의 사랑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혈연(血緣)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가족 구성원은 원칙적으로 아(我)와 비아(非我)의 조합에 불과했다. 그러니 일반 사회에서 요구되는 인간 관계의 기본적인 법칙은 지켜져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사회에서 누군가를 말로써 설득하고 행동으로 감화시킬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가족이라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가족이라고 해서 누군가의 사고와 행동에 마냥 맞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이전까지는 우리 가족이 겉에서 보면 정육면체 상자와 같고, 우리 가족 구성원들은 차곡차곡 그 안에 쌓인 네모난 블록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우리들은 서로 구겨지거나 일부가 뒤틀린 채 정육면체 상자에 욱여넣인 테트리스 블록과 같았고, 우리 사이에는 빈틈이 엄청나게 많음을 깨달았다. 결국 상대적인 경도(硬度)의 차이 때문에 누군가가 좀 더 변형된 채 상자에 들어가 있었을 뿐, 어느 블록 하나 온전한 모습으로 편하게 상자 안에 들어가 있지 못했다. 내가 왜 아버지에게서 스트레스를 받는가, 왜 어머니와 아버지는 늘 항상 같은 이유로 거의 40년째 싸우실까, 왜 내 여동생은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었을까. 다 곱씹어보니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ㅡ 우리는 너무 우리 가정의 모습을 기독교적 가치 하에 이상적인 믿음의 가정으로 포장하곤 했다. 실상은 서로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상처만을 서로에게 깊이 남긴 모자란 구성원들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우리는 그저 구겨지고 짓이겨진 채로 살아왔다. 상태를 바꾸려 하지도 않았고, 실상 인간은 바뀌지 않기에 그것은 해결 가능한 문제도 아니었다. 세상 모든 관계가 다 그러하다. 동등하게 구김없이 온전히 행복한 관계는 세상에 없다 ㅡ 부부도, 부자도, 모녀도, 형제자매도, 어느 누구도. 누군가의 구겨짐(=희생) 없이는 지탱이 불가능한 것이 가족이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요한의 복음서 3:16)


하지만 이 왜곡된 관계 속에서 한 가지 희망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성당마다 달려 있던 예수의 십자고상에서였다. 도대체 저 젊은이는 인류를 사랑한다는 거창한 미명하에 자신의 목숨을 극형의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을까? 당신이 '사람의 아들'이라면 이 패역한 인류가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채 살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을텐데 도대체 무슨 구석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서 인류를 사랑했느냔 말이다. 그런데 십자고상에 못박힌 예수의 모습은 전혀 사랑을 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고통 그 자체였다. 사랑은 고통이다. 왜 사랑이 고통인 것일까? 사랑의 대상이 사랑의 주체 입장에서는 도무지 맘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 왜 사랑하는 것일까? 그 맘에 드는 구석 하나 없는 사람이 불쌍하고 가여우니까. 그건 연민(憐憫) 아닌가? 한 가지 큰 차이가 있다. 연민은 다수가 한 사람에게 품을 수 있을 만한 감정이다. 하지만 사랑은 무조건 독점적이어야 한다. 즉, 나만이 그 사람을 그 불쌍한 상황에서 건져낼 수 있고, 위로해 줄 수 있고, 품어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오직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다. 무거운 짐진 사람은 내게로 오라고 했다.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고 했다. 그의 말에는 항상 내가 너에게 무언가를 독점적으로 베풀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우스갯소리로라도 말씀하신 바 있다. 자신이 아니라면 누가 당신과 결혼생활을 지속하겠느냐고. 그 말에는 앞에서 언급한 사랑과 궤를 같이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너, 하지만 나만이 너를 구원해 줄 수 있다. 즉,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런 사랑이 없으면 모두는 어서 이혼하고 절연하여 남남이 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 여행을 통해 귀중한 것을 배웠다. 나는 내가 참 싫다. 이런 모습을 깊이 내 유전자에 깊이 남겨 놓은 아버지도 참 맘에 들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삶과 성격을 깊이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고, 또 살아 생전 이해에 이를 가능성도 전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생각나는 건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상처들과 부정적인 기억들 뿐이다. 아버지도 뭐 똑같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 삶과 성격을 깊이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고, 또 죽기 전까지 이렇게나 같고도 다른 나를 이해하지 못하실 것이다. 아버지 또한 나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와 상처들만 갖고 계실 것이다. 우린 절망적이게도 서로를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에게 그래도 말을 건네고, 손을 잡아주고, 어딘가 함께 가자고 얘기하고, 내가 무엇인가를 해냈다고 자랑해 드릴 이는 나밖에 없다. 나만이 노쇠한 아버지의 등을 부축하고, 언젠가는 힘겨워서 울지라도 옆에 있어드릴 수는 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 줄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밖에 없다. 나 말고 좀 더 자신의 이상에 맞게 남자답고 건장하며 넉넉히 손주들도 남겨줄 수 있는 아들을 가졌다면 더 행복하셨을테지만, 어쨌든 2025년 현재 그에게 아들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이는 이런 못난 나밖에 없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