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LA 산타 모니카에 있는 한 유스 호스텔의 휴게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는 일찍 침대에 돌아와 잠을 자고 있어야 했지만, 생각보다 LA에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길어지는 바람에 모든 정리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것이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LA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사우스웨스트 항공 비행기가 오전 7시 15분에 있는지라 호스텔에서 공항까지 가는 셔틀 택시를 새벽 5시에 신청했기 때문에 어차피 일어나서 씻는 것을 고려하면 고작 4시간 반밖에 잘 수가 없었는데 피곤한 상황을 고려하면 도저히 이렇게 잠을 자고 일어나기가 힘들 것 같았다. 게다가 시차 적응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현재 시각은 한국에서 한창 활동할 오후 시간이니까 차라리 잠을 자지 않고 버티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바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은 비행기에서나 공항에서도 충분히 잘 수 있고, 어차피 이렇게 고생하나 저렇게 고생하나 피차 일반이다! 결국 나는 잠에 들지 않기로 결심하여 유스 호스텔 1층 식당에 있는 커피 포트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내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쾌히 1달러를 지불하여 코카콜라 캔 하나도 깠다. 이른바 '프로젝트 카페인'.


LA 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달랐다. 너무 긴 이야기인지라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읊어야겠는데, 하나하나 이야기를 해볼까.


우선 첫날에는 사촌 동생이자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종석이를 만났다. 미국 서부로 학회를 떠나기로 결정났을 때, 어머니와 할머니는 내가 LA로 갈 수 있다면 꼭 가서 종석이를 만나주기를 당부하셨다. 그도 그럴것이 종석이가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살기로 결심하고 한국을 떠난지 올해로 꼭 10년이 되었는데,  장성한 친손자를 자주 못 보는 상황이 된 우리 외할머니는 말을 아끼긴 했지만 항상 종석이와 종욱이를 그리워 하셨기에 나라도 대신 만나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으셨으리라. 나도 종석이를 못 본지 거의 햇수로 6~7년은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SNS와 카카오톡을 통해 여러 인사를 주고 받았지만 직접 만나지는 못했기에 이번이 서로 만나기에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마중나온 종석이는 정말 외숙부를 꼭 닮았고 ㅡ 그리고 종석이는 내가 고모부(곧 내 아버지)를 꼭 닮았다고 응수했다. ㅡ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산타 모니카 유스 호스텔로 바로 가기에는 체크인 시간이 맞지 않아 우리는 할리우드에 잠깐 갔고, 점심을 먹은 뒤 산타 모니카로 돌아와 해변을 거닐고 중심가인 3번가(3rd street)를 오갔다. 따사로운 햇살에 살랑거리는 바람, 그리고 수많은 인파와 먹거리. 모든 것들이 활발한 이 곳이 참 마음에 들었다. 한 가지 바보같은 이야기를 중간에 하자면, 놀랍게도 나는 내가 숙소로 정한 이 곳이 해운대와 같은 번화한 휴양지인 것을 몰랐다. 놀란 것이 이 유스 호스텔은 정확히 얘기하면 LA 카운티의 'City of Santa Monica'에 있는 곳인지라 LA 중심가까지는 급행 버스로 1시간이 걸리는 곳이었다. 한적한 해변이라고 생각했던 이 곳의 지도를 다시한 번 자세히 보니 온갖 음식점과 쇼핑몰, 바와 펍, 그리고 놀거리가 풍성한 번화한 해변 유흥지였다. 종석이는 내가 이곳에 묵기를 일부러 의도한 것인 줄 알았다며 의아해 했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 할수밖에 없었다. 나는 스스로 '서울 여행을 왔는데 수원에 묵는 꼴'이라며 웃으며 자조했다.


어둑해지기 전에 한인타운 근처의 El Taurino라는 멕시코 음식점에서 타코를 먹고 그리피스 천문대에 올라 멋진 야경을 감상했다. 종석이에게도 감탄조로 이야기했지만 천문대에서 밤하늘의 별들을 보는 것보다 땅 위의 별들을 보는 것이 더 경이로웠다. 활주로처럼 뻗은 LA 시가지의 불빛들은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했고, 한국과는 달리 낮은 구릉이나 산이 없는 평평한 지형위에 화려한 보석들이 널리 깔린 듯, 저 멀리 산타 모니카 해변의 수평선까지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진정한 장관이었다. 종석이가 차를 몰고 데려오지 않았으면 절대 오지 못했을 곳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종석이는 확실히 이전보다 좀 더 여유가 있었고, 직장을 가지고 일하게 되면서 뭔가 구체적인 생활을 해 나가는 것 같았다. 가족은 모두 과테말라에서 지내고 있는데 홀로 이렇게 나와 생활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텐데, 이렇게 직장도 번듯하게 잘 다니고 있고 잘 생활하는 걸 보니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긴 시간동안 함께 하지 못했지만 다음에 또 찾으면 종석이와 함께 한 잔 더 해야겠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다른 친척들, 특히 외할머니와 함께 이 자리에 다시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둘째날에는 UCLA에서 공부하고 있는 상일이, 그리고 화학부 동문인 정림누나와 준용이를 만났다. 상일이는 어렸을 때 화학 공부를 하는 커뮤니티를 통해 만났던 나보다 한 살 어린 친구인데 대학을 미네소타 대학에서, 그리고 U Penn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UCLA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유능한 친구이다. 범상치 않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Texas A&M 대학에 조교수로 임용되었다는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역시 열심히 자기 일을 해 온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기회와 자리가 주어지는 것 같았다. 내 일처럼 기뻤다. 오랜만에 본 정림누나는 곧 졸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준용이는 한창 박사과정 중이었다. 대학원생 넷이서 연구와 학위, 그리고 전반적인 대학원 생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즐거운 시간이었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똑같구나, 학계에서 잘 살아남으려면 여러 방면에서 노력해야겠다, 뭐 그런 생각? 짧게 든 생각이지만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할 수 있어서, 그리고 이렇게 잘 마칠 수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어서 참 좋았더라. 화학부 05 학번 중에는 유학 중인 학생이 뉴욕의 태호밖에 없어서 해외에서 이런 분위기의 '꼬마 연구자들끼리의' 만남이 드문지라 참 아쉬웠는데, 아무튼 오랜만에 상일이도 보고 화학부 동문들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이들과 같이 점심으로 코리아타운에서 묵은지김치찌개를 먹었는데,  정말 LA의 코리아타운은 신기한 동네였다. 다소 간판과 건물이 촌스러워 보이긴 해도 웬만한 것들은 다 있었다. 여기서는 영어 없이도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수많은 한국인들을 지나쳤는데 여기 한인 인구가 거의 안양시 전체 인구보다 더 많다고 했다. 그러면 뭐 정말 여기는 미국 내의 작은 한국이 아니던가!


이들과 헤어진 뒤에는 교회 후배이자 LA에서 음악 공부를 하던 영익이를 만났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LA에 머물러서 의아했었는데 알고보니 여기서 아예 학부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올해 졸업을 기대하고 있다고 했는데 열심히 음악 공부하며 영어도 공부했던 것을 보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익이는 기타를 참 잘 쳤는데 이제는 얼마나 더 잘 연주하게 된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라치몬트의 한 카페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대학생활과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 공부를 하게 되면서 느끼게 된 점들을 나누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영익이도 나름대로 미국에서 3년 반 정도를 지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돌아오게 되면 무슨 일을 할지 고민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꿈을 쫓아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들여 그것을 성취해낸 것만 해도 나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영익이는 귀국해서도 자신의 역량에 맞는 일들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맙게도 영익이는 이날 하루 종일 내 발이 되어 주었다. 너무너무 고마웠다.


만남은 끝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찬양 동아리 에벤에셀 동기인 경복이와 연락이 닿아서 이날 저녁에 만났다. 곧 혼인할 예정인 여자친구분도 같이 나오셨는데 아주 예쁜 분이었.. 지만 내게는 살이 적당히 빠지고 피부가 그을려 더 건강한 훈남이 되어 돌아온 경복이가 더 돋보였다! 둘은 정말 잘 어울려보였다. 사실 그동안 경복이가 도대체 어떻게 LA로 건너가서 이때까지 약 7년여의 시간을 보내게 된 건지 알 길이 없었는데 이번 만남을 통해 궁금증을 많이 해소할 수 있었다. 경복이도 타지에서 가족과 떨어진 채 참 힘든 시간을 오랫동안 보낸 것 같지만 그래도 잘 이겨내서 대학 졸업과 직장도 동시에 다 해내는 능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미 그런 예쁜 여자친구를 뒀다는 것 자체가 승리자!) 경복이는 내가 하나도 변한 것 같지 않다고 무척 반가워했고, 나도 경복이에게서 긍정적인 무언가를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우리는 중국인들이 활동하는 알함브라 지역의 한 중국 식당에서 훠궈를 맛있게 먹었는데, 정말 어찌나 많은 말들이 오갔는지 4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우리는 으레 서른 살들이 나눌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늘 그런 이야기가 그렇듯 열심히 해서 좋은 소식을 서로에게 전해주자는 이야기로 마무리 지었다. 여자친구분도 중간에 그런 얘길 했지만, 우리가 도저히 10년만에 만나는 사람같지 않더란다. 그런데 나도 경복이가 어색하지 않았고 우리는 곧 전에 만났던 친구처럼 그렇게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SNS의 힘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고등학생 때 많은 것들을 공유했기 때문에 그렇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같은 동아리 동기인 희석이와 기원이게도 오늘의 만남을 이야기해줘야겠다.


LA는 순전히 내 의지로 간 것이었고 분명히 학회와는 상관이 없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LA에 오길 정말 잘했다. 각자 달리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또 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게 참 많았다. 우리들 누구 하나 힘들지 않게 산 사람이 없다. 각자 고충이 있고, 각자 어려움을 헤쳐 나간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사람마다 다른 꿈이 있고 목표가 있다. 혼자 있을 때는 내 것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니 다른 이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또 그것을 통해 내 것을 비춰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과 자세를 진심으로 칭찬하면서 동시에 내 것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스런 눈으로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정말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렇게 잘 걸어온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인 것이 바로 내 고등학교 동아리 이름의 뜻처럼 그가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기' 때문이다. 진짜 여기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리고 작지만 귀중한 성과를 가지고 졸업을 준비하는 것도, 그리고 세계 각 곳을 돌아다니는 기회를 갖게 된 것 그 모든 것들이 정말 내겐 놀라운 기적과도 같은 것들이다.


이제 내일이면 귀국행 비행기를 타고 수요일부터 학교 업무에 본격 복귀한다. 이제 졸업을 위한 논문 작성과 그 외의 일들로 매우 바빠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연구를 시작할 때 가졌던 마음가짐을 잃지 말고 진짜 성심성의껏 모든 일들을 잘 해내야겠다. 10여일간의 해외 체류 기간에 종지부를 찍는 이 시점에서 불현듯 행복감에 젖어 있다. 진짜 좋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