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시약들이 거의 도착했으므로 ― 물론 가장 중요한 시약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지만... ― 가장 기본적인 실험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0.4 nm 짜리 기공을 가지는 분자체(molecular sieve)를 미리 넣어두었던 테트라하이드로퓨란(tetrahydrofuran)을 증류(distillation)하는 과정이었는데, 박사과정동안 유기 용매에 미량 들어가 있을 수 있는 물의 존재에 대해 단 한번도 고찰해보지 않고 그냥 사용했던 나로서는 첫 출발부터 신세계였다.


이미 화학과에 있는 스톡룸(stockroom)에 들러서 필요한 유리기구들과 온도계 등을 구매했었다. 참고로 미네소타 대학을 비롯한 미국의 큰 대학들의 특징은 화학실험에 필요한 각종 기자재 및 소모품들을 학과 차원에서 대량으로 구매해서 재고로 쌓아둔 뒤 이를 내부 연구원들에게 판매하는 형식으로 실험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한다. 물론 아무나 이 스톡룸에서 약품과 기자재를 구매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연구비 카드마다 할당되는 출입증을 가진 연구원들만이 구매할 수 있다. 한편 스톡룸에서는 대량으로 물건을 들여오므로 업자로부터 구입하는 기구 및 시약들의 단가가 낮아지게 되고, 게다가 이윤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들여온 값이 그대로 판매되는 가격이 된다. 따라서 연구원들은 물건이 필요할 때 바로 쉽게, 그리고 싸게 구매할 수 있는 이점을 누릴 수 있다. 실제로 정식 구매 절차를 통해 외부 공급업자로부터 구매하는 경우보다 무척 싼 값에 시약들을 구매할 수 있는 것이다.


한가지 첨언하자면, 이와 같은 시스템은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땅덩이가 너무 커서 발현 가능한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미국의 한 주(州)보다도 크기가 작은 대한민국에서는 수입업자나 제조업자가 재고로 가지고 있는 물건이 '택배'라는 배송수단을 통해 전국에 실핏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장소에 신속하게 배달될 수 있다. 심지어 주문한 날 당일에 배송이 가능한 대한민국 아닌가. 물론 이러한 총알배송은 택배기사님들의 엄청난 수고로움과 착취(?) 비스무레한 것이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아무튼 대한민국에서는 택배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부담이 덜한 편이다. 따라서 각 연구실에서 필요한 만큼 소량 구매를 해도 연구실 측에서나 공급업자 측에서나 부담이 없다.


그러나 미국은... 당장 내가 지난 주에 구매 신청한 물건은 밀워키(Milwaukee)의 재고 창고에서 배송되는 물건이었는데, 밀워키는 미네소타(Minnesota)와 인접한 위스콘신(Wisconsin) 주의 가장 큰 도시이지만, 직선 거리로 480 km 정도이며 자동차로 5시간 거리에 있다. 그런가하면 미니애폴리스에서 가장 가까운 피셔 사이언티픽(Fisher Scientific)이라는 시약 및 기자재 공급회사의 창고 위치는 일리노이(Illinois) 주의 하노버 파크(Hanover Park)라는 곳에 있는데 직선 거리가 530 km 이다. 만일 택배 아저씨들이 우리 나라처럼 소량 구매 물품을 가지고 주를 왔다갔다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나마 미니애폴리스는 미국 중서부에서도 큰 도시니까 망정이지... 그러니 이런 스톡룸 체제가 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스톡룸 얘기가 이렇게 길어졌네. 아무튼 거기서 산 각종 조인트, 리비히 응축기(Liebig condenser), 둥근바닥플라스크(RBF, round-bottom flask) 등을 켁 클립(keck clip)으로 연결하고 온도를 서서히 올리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더니 이제 THF가 끓기 시작한다. 끓어오른 증기가 온도계가 놓여진 위치까지 도달하게 된 이후부터는 리비히 응축기를 통과하는 증기가 응축되면서 액체의 THF 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소요 시간. 증류는 대략 1분에 15~20방울 정도씩 얻는 게 이상적인 속도라고 하는데 그 말은 만일 물이라면 1분에 1 mL 도 채 못 얻는다는 뜻이다. 결국 몇 시간 동안 증류에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시작할 것을 하는 후회가 조금 들긴 한다.


아마도 중간에 끊어 놓고 증류 과정을 내일 더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도 첫 출발 치고는 아주 부드럽다. 솔직히 내가 이곳에 와서 증류를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비록 대학원에 있을 때 그래핀 외에는 합성이란 걸 해본적이 별로 없지만, 각종 동영상 및 실험 자료등을 토대로 여러모로 궁리를 해본 덕택에 큰 무리없이 잘 진행될 듯 하다. 물론 나는 화학부 졸업생이니까 이 정도 화학 실험은 능숙하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맞기는 하다. 아마 포닥 기간동안 여기 화공재료학과 학생들에게 '화학과 학생은 이런 것도 할 수 있어~' 라는 걸 잘 시연해줘야 쪽팔림을 면할 수 있을 것 같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