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학교 웨스트 뱅크(West bank)에 있는 수어드 협동조합(Seward Co-op)에서 먹거리를 사려고 들렀을 때 몸에 좋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는 비트(beet)라는 채소를 같이 산 적이 있었다. 자주색 무처럼 생긴 이 채소를 먹기 위해 어제 긴꼬리 처럼 난 뿌리와 줄기, 잎을 모두 제거하고 몸통 ― 그러나 내가 몸통이라고 칭하는 먹는 부분은 결국 거대한 뿌리인 셈이겠지? 무처럼... ― 의 껍질을 모두 벗겨내었고, 먹기 좋게 알맞은 크기로 썰어놓아 그릇에 담아 두었다. 그리고 밥을 먹을 때 한 조각씩 천천히 맛을 보았다. 비트는 무처럼 맵지도 않은 것이 콜라비(Kohlrabi)와는 또 다른 맛이었는데 달콤한 맛도 있고, 무엇보다도 굉장히 단단해서 무른 식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굉장히 좋아할 만한 채소였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데 정말 아침 졸음이 싹 달아날 정도로 깜짝 놀랐다. 아니, 피가, 피.. 피가 변기에 한 가득 있는 것이 아닌가? 혈뇨인가 혈변인가? 아니 내장에 출혈이 있단 말인가? 내가 이역만리까지 와서 이렇게 급사(急死)하는 것인가? 어제 진공 오븐 속에 말려두었던 고분자는 영영 확인이 불가능한가? 아니 이 젊은 나이에 이런 시련을 겪게 하시다니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뭐 이런 생각이 지나갈 찰나, 과학자의 눈으로 다시 한 번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렇다. 대강 가늠해보았더니 그것은 피가 아니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 색깔이 적색(red)이 아니라 마젠타(magenta)색에 더 가까웠으므로 그것은 피일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정체 모를 색소는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어제 먹은 것이 무엇인지 기억을 더듬게되었고,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음식이 있었다: 비트!


비트의 독특한 붉은 색은 베타닌(betanin)이라고 불리는 색소 분자 때문이다. 색깔을 내는 유기 분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베타닌도 방향 고리(aromatic ring)와 연결된 공액계(conjugate system)가 특징적으로 존재하는데, 이로 인해 발현되는 베타닌의 붉은 색은 워낙 강렬하고 또 독특해서 다양한 염색에 활용된다고 한다. 베타닌에는 포도당이 결합되어 있는데다가 ― 수산화기(hydroxyl) 천지! ― 베타닌 자체가 카복실산(carboxylic acid)이기도 하므로 굉장히 물에 잘 녹는 편이다. 그러므로 몸 밖으로 배출된 이 베타닌이 변기 안의 색깔을 굉장히 빠르고 드라마틱(?)하게 바꿔놓은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덜 깬 눈으로 아침에 그것을 확인한 나는 '에그머니나!' 하고 깜짝 놀라자빠졌던 것이고.


그런데 비트 한 조각에 들어있는 베타닌의 양이 어찌나 많았던지 하루 종일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화장실에서 그 붉은 색의 기운이 출몰(出沒)하였다. 혈흔(血痕)이 아닌 비트흔(痕)이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비트는 한가득 쌓여있으니 앞으로 화장실에서 (비정상적으로) 붉은 색깔에 더 이상 당혹해서는 안 될 듯 싶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