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투고된 논문이 계속 거절되는 상황을 빗대어 '미끄러진다'고 얘기하곤 한다. 오늘 게재 승인이 된 논문이 그 말마따나 늘 미끄러지던 논문이었다. 처음 투고한지 대략 10개월 가까이 된 것 같은데, 데굴데굴 굴러온 끝에(?) 이제야 정식으로 논문이 추가 수정 없이 받아들여졌다.


사실 이번에 게재 승인된 논문은 개인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논문이기도 하다.


우선 이번 연구 논문의 주제는 서울대학교에서 내가 주도적으로 진행했던 연구들 중 가장 마지막 연구 주제였다. 이 연구를 착수하게 된 계기는 2013년 보스턴(Boston)에서 열렸던 미국 재료학회(MRS) 가을 학회에 참석했을 당시 들었던 Edwin Thomas의 강연이었다. 그때 Thomas 교수는 이온성 액체(ionic liquid)를 블록 공중합체의 판상형 나노구조에 삽입시키면 한쪽 도메인이 선택적으로 굉장히 많이 팽윤될 수 있음을 투과전자현미경(TEM) 사진으로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선택적으로 팽윤된 블록 공중합체 필름은 제어 가능한 광 밴드 갭을 가지는 광결정(photonic crystal)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당시 이 강연을 듣다가 든 생각은 '우리는 블록 공중합체 마이셀을 잘 다룰 수 있으니까 어쩌면 마이셀의 코어에 저와 같은 이온성 액체를 선택적으로 도입할 수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것이었고, 귀국 후 연말연시가 지나자마자 간단한 실험을 진행해봤더니 정말 그러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시기는 굉장히 심적으로 방황(?)하던 시기였는데 새로운 연구 주제의 등장 덕분에 한동안 정말 열심히 TEM, AFM 사진들을 신나게 얻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일은 당시 학부생이었던 한 학생과 진행했던 일이었다. 3월부터 연구 참여 학부생으로 우리 랩에 들어와서 내가 맡아 지도를 하게 되었는데 항상 성실하고 치밀하게 시료를 준비해 주어 적잖이 놀랐었고, 결과적으로는 그 덕을 내가 굉장히 많이 봤다. 참고로 학부생과 진행한 일이 논문으로 출판된 것이 이번에 두 번째인데 두 경우 모두 학부생들이 나를 일하게 만든 경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생들이 참 성실하고 의욕적으로 일을 잘 해 주었다. 그러고보면 내가 참 학생 복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 논문은 내가 최초로 교신 저자(corresponding author)로서 저술한 논문이 된다 (물론 공동 교신 저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교신 저자는 해당 연구 논문의 총책임자로서 논문의 투고와 답변 등을 책임지는 저자의 역할을 하며 대개 연구를 진행한 단체의 책임자 ― 대학원의 경우 연구실의 책임자는 지도교수님 ― 가 교신 저자가 된다. 과학 논문의 저자 목록을 유심히 보면 간혹 아스테리스크(*)가 붙은 이름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해당 논문의 교신 저자이다. 따라서 내 이름에 교신 저자 표가 붙었다는 것은 내가 이제는 학생의 위치에서 점차 벗어나 독립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연구자로 나아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꽤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래봐야 여전히 교수님들 밑에서는 꼬마 연구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계속 논문을 써 내야 할텐데. 지금 하는 일이 어서 잘 풀렸으면!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