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총동창회에서 택배를 보냈다고 연락이 왔다. 이사 가기 전의 주소로 보내졌다가 반송되어 새주소로 다시 전송되었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보니 책상 위에 놓여있는 택배 물건. '당장 나를 끄집어 내거라!' 하고 호통치고 있는 것인양 상당히 근엄한 광택을 내는 회색 비닐로 포장되어 있었다. 나는 이것이 분명 인명록(人名錄)이라든지 새해 달력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이게 웬걸. 포장을 벗기고 나니 고급스런 느낌이 나는 붉은 양장본. 다이어리인가 싶어서 표지를 보니 'Il Principe'라고 쓰여 있었다. 아, 결국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왔구나. 나도 모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영단어 공부를 위해 샀던 캠브리지 대학 출판사의 'Vocabulary in Use'의 한 장(章)에서 다루는 내용이 바로 인명(人名)에서 비롯된 단어들이었는데, 그 중에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과거의 이탈리아 사람. 그때는 예전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했던 책략가 정도로만 인식하고 지나갔었다. 그러던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 건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의 책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이라는 책의 서평에서였다. 그리고 그의 책 '군주론(君主論)'은 학부때 서울대학교에서 선정한 책 100선(選)에 선정되었고 마키아벨리의 이름은 다시한 번 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고, 지하철을 타고 오가며 주말동안 조금 읽었는데, 짧은 여러 글 안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 치세 전후의 이탈리아 및 남유럽 정세가 복잡하게 인용되어 있었다. 그나마 교회사를 간략하게 훑어보면서 알렉산데르 6세, 율리오 2세(Iulius II), 레오 10세(Leo X)로 이어지는 이 복잡한 시기에 교황령을 둘러싼 각종 이탈리아 가문들과 프랑스, 스페인 왕국,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이 벌인 혼란상을 대충 눈치챈 덕분에 이 책에서 여기에 등장하는 지명이나 인명, 상황들이 완전히 금시초문인 것이 아닌게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읽는 내내 '내가 만일 이탈리아 역사를 좀 더 잘 알고 있었더라면 이 글을 읽을 때 마키아벨리의 주장이 좀 더 생생하게, 그리고 설득력있게 다가왔을텐데...'라는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전반부에도 충분히 인상적인 글귀들이 많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가 과연 '마키아벨리즘'이 내포하는 그 의표를 풀어헤칠 때쯤이면 더욱 경탄해 할 말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벌써부터 든다. 전반부만 읽었을 따름이나, 비록 이 책이 수백년 전 군주의 처세(處世)에 관해 논한 짧은 헌상서(獻上書)였다지만, 하루하루가 전쟁이라고 하는 현대 사회를 사는 사회인들의 처세에도 분명 도움이 될만한 훌륭한 지침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고전(古典)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무언가를 책장과 활자 속에 짊어지고 있다.


아참. 이 책은 분명 어린 학생이 읽어서는 안 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게 무의미한 감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면 수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