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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서 따지는 수요-공급 곡선을 고려해보면, 수요가 없는 공급의 가격은 0원이다. 하지만 수요자 아닌 수요자가 공급을 받는 데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를 따져보자면 오히려 가격은 음(-)의 값이 되는 것이 당연지사. 이런 실리 없는 장사가 매일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수요 없는 공급'의 기저에 꽉 찬 자기애(自己愛)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 자신이 경험한 것, 자신이 배운 사실에 대한 확신과 애정이 가득해서 그것을 베푸는 행동 자체가 자신의 기쁨이다. 그러니 자신의 공급이 반향(反響) 없는 일방향 외침으로 전락할 지라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이다. 아버지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이는 딱히 틀린 추론이 아니다.
그런데 나 또한 [아버지의 더러운(?)] 이 특성을 물려받았기에 여기서 크게 자유롭지 않다. 관계가 가까운 사람들이 모인 단체톡방에서 나는 온갖 잡다한 정보를 실어 나르고 공유하는 대표적인 멤버이다. 내가 자주 써먹는 고품격 언어유희도 '수요 없는 공급'의 훌륭한 예시이다. 당장 이 홈페이지만 해도 '수요 없는 공급'의 정점이다. 누가 나더러 내 얘기를 세상에 내보여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나? 사람들이 시시콜콜한 내 일상이나 내 생각, 그리고 내가 진지하게 고려하는 주제들에 대해 궁금해하기는 하던가? 따지고 보면, 연구원에서 진행하는 연구개발 행위 역시 가끔은 '수요 없는 공급' 성격을 띠는 것이 더 많다. 누가 내 연구에 대해 궁금해 하기는 할까, 이게 진짜 실생활에 유용한 기술로 연결될 수는 있는 것일까, 논문을 쓰고 각종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이걸 읽어보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연구개발이 이름만 거창할 뿐이지 실상 내 만족을 위한 취미 활동인 것은 아닐까. 차라리 뜨개질이나 도자기 굽기는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 구체적인 물품 제작으로 이어지기라도 하지, 각종 바이오매스(biomass)를 탄화(炭化)하는 연구가 우리 삶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이어지다보면 이 일 역시 '수요 없는 공급'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실은 내가 태어난 것도 '수요 없는 공급'이다. 무슨 필요에 의해 부모님이 나를 생산(!)해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일단 모태(母胎)에서 박차고 나와 세상의 빛을 보기는 했는데, 글쎄 80억 인구가 모여 사는 지구 사회에 나를 딱히 필요로 할 이유가 없으니 사회에서의 내 생명 값어치는 냉정하게도 0원이다. 그러니 세상에 '던져진'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세상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수요를 창출해서 값어치를 올려 받는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생이란 수요 없이 공급된 자가 수요를 창출하여 공급하는 일련의 과업을 완수하는 여정이 아닐까. 갑자기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Supply creates its own demand).'는 경제학의 격언이 떠오르는 것은 왜이며, 갑자기 '수요 없는 공급'을 광범위하게 행사하는 아버지의 행동이 너그러이 이해되는 이유는 왜일까.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