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4(일) ㅡ 下]


카를스루에(Karlsruhe)에서 마인츠(Mainz)로 향하는 RE (Regional Express) 열차에 탑승했는데, 열차의 출발 지점이라 편안히 앉아서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독일 정부의 9유로 정책 ㅡ 올해 여름에만 한시적으로 ICE, IC와 같은 특급 열차를 제외한 나머지 공공 교통 수단의 이용료를 한 달 9유로 정기권 구매로 대신하는 정책 ㅡ 으로 인해 일반 열차와 대중교통 이용객 수가 급증했던 것. 카를스루에 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는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그야말로 '가축수송'이었다. 역무원은 승객들에게 안쪽으로 더 들어가라고 쉼없이 권했고, 차량 내 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열차는 출발 예정 시각을 조금 더 넘겨 달리기 시작했고, 나는 타는 곳까지 마중 나왔던 Katta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원래 계획은 카를스루에에서 바로 마인츠로 가는 것이었지만, 도저히 마인츠에서 이른 시각에 보름스(Worms)로 돌아올 자신이 없어서 Victor에게 문자를 보내 먼저 보름스의 호텔에 체크인한 뒤에 마인츠로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명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해 약간의 혼선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나는 먼저 보름스에 내려 보름스 대성당 근처에 미리 예약해 둔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잠시 숨을 돌린 뒤 마인츠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마침 이 날 마인츠 축구팀이 경기를 하는 날이라서 그랬는지 역 안팎으로 빨간 유니폼을 입은 마인츠 시민들이 떼로 있었고 역전은 극히 혼란스러웠다. 내가 먼저 마인츠 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Victor과 그의 여자친구인 Charlene이 나오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인사했다. 둘을 함께 본 것은 6년 전 마인츠에서였는데 둘 다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리 긴 시간을 마인츠에서 보낼 수는 없었다. 우리는 역 근처에 Pomodoro라는 이탈리아 음식점 야외 자리에 앉아 파스타와 피자를 먹었고, 맥주를 곁들여 먹었다. 가는 길에 마인츠에도 치맥집이 생긴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Victor는 아직도 한국인이 대표로 있는 원자간력현미경(AFM, atomic force microscopy) 관련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주말에는 자신이 대표로도 있는(!) Gutleut라는 음식점에서 일하며 가끔 DJ도 한다고 했다. 코로나19 관련 문제도 이젠 좀 풀렸겠다, 다음에 출장차 서울에 오면 한 번 또 볼 수 있을 거라고 얘기도 했다. 여자친구인 Charlene은 원래 영국 출신이지만 최근에 독일에 일자리를 잡고 일하게 된 덕에 좀 더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참 잘 된 일이었다.


한 두어시간 정도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뒤 우리는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마인츠 역 안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마침 타는 곳에 열차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열차를 타고 이번 독일 여정의 유일한 여행지였던 보름스로 다시 향했다.



[8/15(월)]


독일 여정의 마지막 날이자 유일한 개인 여행의 날인 광복절. 나는 보름스 대성당(Wormser Dom) 근처에 잡은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일어나 호텔 아침을 먹었다. 생각보다 다양한 메뉴와 질 좋은 음식 맛에 놀라워하며 아주 배불리 아침을 먹었다. 아침 공기는 그닥 따뜻하지 않았는지라 긴팔을 입은 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몸을 데웠는데, 오후께에는 생각보다 더워져서 좀 혼났다.


보름스 대성당이 아직 개방되지 않은 이른 시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우선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의 모습이 동상으로 표현되어 있는 루터 기념 공원(Lutherdenkmal)에 가서 동상들의 모습과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보름스를 여행 목적지로 삼은 이유는 유일하게 바로 이것이었다 ㅡ 기독교인이라면 개신교 역사상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루터의 행적이 극적으로 드러났던 이 역사적인 곳에 반드시 와 봐야한다! 1521년 보름스에서는 제국의회(Reichstag)가 열렸고, 카를 5세가 주재한 이 회의에서 자신의 양심을 꺾지 않고 성서와 이성을 바탕으로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주장을 천명한 그의 용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루터 공원에 있는 루터 동상은 성서를 손에 든 채 다른 동상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것이 마치 성서의 권위에만 의지하며 하느님을 바라보는 그의 신앙관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루터 공원에는 루터 외에도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얀 후스(Jan Huss),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피터 발도(Peter Waldo), 필리프 멜랑히톤(Philip Melanchton), 요한 로이클린(Johann Reuchlin)과 같은 종교 개혁 선구자들의 동상이 서 있었고, 또 기념물 네 면에는 루터의 행적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마그데부르크(Magdeburg), 슈파이어(Speyer),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를 의인화한 동상과 함께 루터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옹호하여 그의 개혁 운동이 끊어지지 않게 도와준 작센(Sachsen)의 선제후(選帝侯)인 프리드리히 3세(Fridrich III) 및 헤센(Hessen)의 방백(方伯)인 필립 1세(Philip I)의 동상도 서 있었다. 개신교인이라면 마땅히 와서 그의 기개를 추념할 만한 장소였다.


루터 기념 공원을 돌아본 나는 그제서야 대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인 보름스 성당의 외관은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으나, 내부 제단이 극히 화려했다. 내부와 외부의 이 기막힌(?) 대비는 차츰차츰 확장된 보름스 성당의 역사와 9년 전쟁으로 인해 철저하게 파괴된 이 지역의 성당의 아픈 역사를 함께 보여주고 있었다. 루이 14세의 프랑스는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는데, 그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던 지역 중 하나가 바로 보름스를 비롯한 독일의 라인강 서편 지역이었다. 심각한 손상을 입은 성당 제단은 결국 새로 세워져야 했는데, 이 때 새롭게 설치된 제단은 로코코 양식의 극히 섬세한 조각으로 구성된 제단이었다. 그래서 약간 투박해 보이기도 하는 성당 외관과는 무척 대비되는 것이었다. 참고로 독일에는 제국성당(Kaiserdom)이라고 해서 오토 왕조의 왕실 성당으로 지어진 성당이 세 개 있는데 마인츠와 슈파이어, 그리고 보름스의 성당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는 이날 보름스 대성당에 들름으로써 세 개의 제국성당에 모두 방문해 본 이력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튼 보름스 대성당을 돌아본 뒤 근처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보름스의 몇몇 개신교회들을 둘러보았다. 루터의 목소리가 아직도 살아 숨쉬는 듯한 이 동네에서 교인들의 흔적을 하나하나 밟아보는 것은 매우 뜻깊었다.


기차역에 가기 전에 상점에 들러 리터 슈포르트(Ritter Sport), 밀카(Milka), 하리보(Haribo) 등 초콜릿과 젤리 과자를 잔뜩 샀다. 조카 희준이에게도 주고 친구들에게 나눠 줄 선물로서 말이다. 그리고나서야 나는 전자책으로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보름스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원래대로라면 마인츠에서 내려서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으로 가는 S-bahn 열차를 탔어야 했지만, 어차피 시간도 충분한데다가 그리 급하게 움직일 필요도 없을 것같아 그냥 앉은 김에 종착역인 프랑크푸르트 중앙역(Hauptbahnhof)까지 갔다. 정말 오랜만에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갔는데 진짜 사람이 많았다. 여기서 국제공항까지 가는 S-bahn을 타고 드디어 닷새만에 공항에 도착. 나는 체크인을 마친 뒤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의 라운지로 향했다 ㅡ 내가 스타얼라이언스 다이아몬드 회원이라서 공항 비즈니스 라운지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샤워를 하고, 옷을 다 갈아 입은 뒤 가뿐한 마음으로 소시지와 맥주를 곁들여 먹으며 긴 비행을 준비했다. Bernd와 Hannah에게 공항에서 곧 떠날 준비를 한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한국에 있는 친구와도 전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편안하게 비행 여정을 준비한 덕인지, 귀국길 비행편은 아주 편안했다. 총 11시간 정도의 비행 시간 중 7-8시간 동안 푹 잤으니 이보다 더 편안한 비행길은 없었으리라. 아주 어려움 수준의 스도쿠(Sudoku)도 한 판 깨서 기분이 더 좋았다. 옆옆 창가 자리에 고양이와 함께 비행기를 탄 여성이 있었고, 항공사에서는 복도쪽에 앉는 나를 배려한다고 그 여성과 나 사이에 자리는 아예 비워두었는데, 걱정과는 달리 고양이가 가는 내내 별로 울지도 않고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아서 큰 불편함은 없었다. 물론 자느라 고양이가 있다는 것을 신경조차 쓰지 못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수하물을 챙겨들고 서편에 있는 코로나19 PCR 검사소로 향했다. 익산의 보건소에 가서 검사하면 무료로 PCR 검사를 할 수 있지만, 언제 익산에 도착할 수 있을는지 확신도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검사 결과가 빠르게 나올수록 무조건 좋은 것이었기에 나는 8만원 정도의 추가 비용을 내고 공항 내의 검사소에서 PCR 검사를 받았다. 이틀 전 독일에서 신속항원검사를 위해 내 코를 찔렀던 독일의 검사요원과 비교하자면 훨씬 더 마일드하게,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후벼주시었다.


엿새간 공항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 시동을 걸고 익산으로 바로 내려갔다. 코로나19 문제만 없었다면 시흥 집에 들러 기념으로 산 과자를 희준이에게 잔뜩 주고 나왔을텐데, 정부 지침은 지침대로 잘 따라줘야 하는만큼 나는 바로 익산으로 내려갔다. 대략 3시간 조금 넘게 걸렸는데, 무척 쾌청하고 맑았던 인천 하늘과는 달리 익산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듯한 흐리고 꾸물거리는 날씨였다. 나는 빨래할 짐을 모두 세탁기 근처에 쌓아 두고, 짐 정리를 마친 뒤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없는 동안 고무나무는 잎을 두어개 더 활짝 피웠다. 그래, 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가기 마련이지.


나는 그 다음날부터 바로 업무에 복귀해서 연구 과제 평가 관련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앞으로도 이런 짧은 4-5일 정도의 미주/유럽 여행에 대해 크게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될 것 같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