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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2-15

Religion 2-15

동서교회 대분열 15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15

서방 교회 대이교 2
Western Schism II


목차

  1. 서구 대이교의 파장
  2. 교황 위의 공의회
  3. 참고 사이트 및 출처

서구 대이교의 파장

그레고리오 11세(Gregorius XI: 1370-1378)는 아비뇽 교황청을 떠나 로마로 귀환하여 아비뇽에서의 생활을 마무리짓는다. 로마의 주교가 드디어 로마로 돌아왔으니 이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만 같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의 선종 이후에 발생했다. 교황이 몇십년 만에 돌아온 로마에서 제대로 교계 구조를 재확립하지 못한채 로마로 귀환한 지 1년만에 죽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서방교회의 수장 자리를 놓고 추기경단의 세력 다툼이 불거지게 되었고, 이 때를 놓칠세라 이탈리아인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이제는 교황청이 로마에 왔으니 교황은 로마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의 회의체인 콘클라베(conclave)에 강한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6명의 프랑스인 추기경들은 아비뇽으로 달아날 정도였다.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이탈리아인들은 추기경들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나가지 못하도록 시내를 아예 봉쇄해 버렸고, 다음과 같이 고함을 질러댔다.

우리는 로마 사람을 원한다! 최소한 이탈리아인이어야지!

뿐만 아니라 콘클라베가 열리는 장소를 창으로 찌르는가 하면 지붕을 뚫으려는 시도도 있었으며, 심지어 창문 아래 불을 붙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난잡한 상황이 얼마나 위협적이고 무시무시했는지 프랑스인 추기경이었던 아데마르 다그리퓔유(Adhémar d’Aigrefeuille)는 가장 어린 이탈리아인 추기경이었던 지아코모 오르시니(Giacomo Orsini)에게 넌지시 속삭였다:

죽느니 차라리 악마를 교황으로 선출하는 게 낫겠구만

결국 나폴리 왕국 사람이자 바리(Bari)의 대주교였던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Bartolomeo Prignano)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 우르바노 6세(Urbanus VI: 1378-1389)가 된다. 이제 우르바노 6세는 로마에서 선출된 적법한 교황으로서 아비뇽 유수 때 막대한 타격을 입었던 교회의 제반 문제를 해결할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빗나갔다. 우르바노 6세는 매우 보수적이고 완고한 사람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교황이 아비뇽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하였고 이탈리아는 교황이 당연히 로마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므로 두 세력의 균열은 여전히 심대했기 때문에 신임 교황은 추기경 사이에서 분열과 대립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탁월하게 행동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교황은 아비뇽 유수기에 막대한 이권을 챙겼던 추기경들 ㅡ 특히 프랑스인 추기경들 ㅡ 을 매우 고압적인 태도로 훈계했다. 이에 반감을 가지게 된 프랑스 추기경들은 아나니(Anagni)에서 회의를 열었고, 교황을 그 장소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사실 프랑스 추기경들은 교황을 거기서 주살하려고 했고, 우르바노 6세는 그들의 사전 모의를 간파했기에 아나니에 가지 않았다.

이에 상황을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프랑스 추기경들은 1378년 8월 20일, 적법한 교황이 현재 없으니 교황좌가 공석이라고 선언하였으며, 폰디(Fondi)에서 자신들만의 콘클라베를 열어 로베르 드 쥬네브(Robert de Genève)를 교황으로 선출하였으니 그가 대립교황(對立敎皇, antipope)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1378-1394)였다. 가톨릭 교회의 목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 주장하는 교황이 두 명이 되었다! 서방 세계에 들어선 두 명의 교황은 서로를 적그리스도라고 비방하고 불법적으로 교황좌를 탈취한 자로 매도하였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야심만만한 클레멘스 7세는 로마의 산탄젤로(Santangelo) 성에 머물면서 로마를 탈취하고 우르바노 6세를 끌어내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용병에 의해 점유되었던 산탄젤로 성이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함락되자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나폴리 왕국으로 피신했고, 최종적으로는 옛 프랑스인 교황들이 거처하던 아비뇽 교황청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결국 서방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적법하다고 주장하는' 교황이 각각 로마와 아비뇽에서 대립하는 초유의 분열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를 서구 대이교(西歐大離敎, Western Schism)라고 부른다.

서구 대이교의 당사자들: (좌) 로마의 우르바노 6세,1 (우) 아비뇽의 클레멘스 7세 2

서구 대이교는 종교 세계의 분열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교황청이 둘로 나눠지자 유럽의 각 나라들도 교황을 따라 두 편으로 나눠졌다. 아비뇽 교황을 지지하는 중심축은 프랑스와 나폴리 왕국, 그리고 카스티야(Castilla) 및 아라곤(Aragon) 왕국이었다. 이 나라들에 대적하는 나라들은 자연히 반대편인 로마 교황을 지지했는데 곧 프랑스와 백년 전쟁을 벌이는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에 반발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플랑드르인들, 카스티야 왕국과 대립했던 포르투갈이 그러했다.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스코틀랜드와 반란을 일으킨 몇몇 웨일스 지방의 사람들은 잉글랜드와는 반대로 아비뇽 교황을 지지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로마의 교황을 지지했고, 프랑스와 별 관계가 없는 다른 유럽 국가들 ㅡ 덴마크, 헝가리, 폴란드 등 ㅡ 역시 로마 교황을 지지했다. 보니파시오 8세(Bonifacius VIII: 1294-1303)가 부르짖은 '한 목자에 의해 인도되는 한 무리의 양떼'같은 그림은 이제 정말로 없던 일이 되었다. 두 명의 목자가 편가르기를 해서 양떼를 나눠놓고 서로 이권을 차지하느라 신경전을 벌이는 추한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는 와중에 1347년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이 유럽 대륙을 덮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온 도시가 전염병에 신음하게 된다. 밀라노(Milano)와 같은 몇몇 도시들은 참화를 입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도시들은 온몸이 검게 되면서 죽어가는 이 역병에 속수무책이었고, 당시 유럽 인구의 1/3에서 많게는 1/2가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흑사병의 유행은 사회 분위기를 매우 흉흉하게 만들었는데, 유대인들과 병자들에 대한 대량 학살이 벌어진 것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비롯되었다. 기독교도 흑사병의 유행을 멈추지는 못했으며, 심지어 축성된 물에 담근 성물들도 전염병을 옮기는 매개가 되어 성직자들도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와중에 사람의 구제는커녕 권력 싸움에만 몰두하는 교회 고위 성직자들에 대한 인식은 더욱 나빠지게 되었다. 염세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흑사병을 인간에 대한 신의 징벌로 여기는 사람들이 점차 늘었고, 이는 기독교에 대한 의구심으로 옮겨 갔다.

흑사병의 유행은 중세 유럽의 모습을 바꿔놓은 원인 중 하나였다. 3

따라서 14세기부터 서방 교회를 개혁시키고자 하는 운동이 생기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이전부터 성경에 적힌 하느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설파에 초점을 두는 복음주의 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영국에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가 활동하였고 보헤미아(Bohemia) 지방에서는 얀 후스(Jan Hus)가 활동하면서 교회의 개혁에 대한 진보적인 목소리를 냈다. 한편, 가톨릭 신학자들 중에서는 신앙의 체계는 유지하되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윌리엄 오브 오컴(William of Ockham)으로, 그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청빈을 주장했던 프란치스코회를 이단으로 몰아 극단적으로 수도사들을 화형시켜 버린 교황 요한 22세(Ioannes XXII: 1316-1334)를 공박하고 비난했다. 당시 그는 보편 교회는 절대로 오류를 범할 수 없더라도 교황이라는 개인은 오류를 범하는 이단자가 될 수 있다고 과거의 예를 들어 주장했다.4 따라서 교황의 오류는 전체 교회가 바로잡아야 하며, 이는 곧 보편 교회의 결정이 교황의 뜻보다 더 위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설파했다. 이탈리아의 학자인 마르실리오 다 파두아(Marsiglio da Padova) 역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펼쳤으며 교황의 수위권에 대항하여 오직 보편 교회만이 오류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보편 교회의 의견은 수많은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의견 일치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이것은 곧 공의회를 의미했다. 따라서 보편 교회의 회의체가 교황보다 더 우월하다는 이들의 주장은 곧 공의회 수위설(公議會首位說, Conciliarism)로 불렸다.

공의회 수위설에 의거한 서구 대이교 해소 운동은 파리(Paris) 대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파리 대학교의 철학 및 신학 교수였던 하인리히 폰 랑겐슈타인(Heinrich von Langenstein)은 이미 1381년에 논설 'Epistola concilii pacis' 에서 공의회를 통한 분열 해소를 주장하였다. 1394년에 파리 대학교는 분열 해소를 위한 세 가지 방책을 내놓는데, 첫번째는 두 교황이 자진 사임하는 것(via cessionis), 두번째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판결하는 것(via compromissi), 세번째는 공의회를 개최하는 것(via synodi)이었다. 사람들은 첫번째 안이 가장 깔끔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양 교황의 퇴위를 추진했으나 그들은 호락호락 교황좌를 내놓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실제로 로마에서 선출된 교황 보니파시오 9세(Bonifacius IX: 1389-1404)와 아비뇽에서 선출된 교황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 1394-1423)는 서로 화해하고자 하는 열의를 뜨겁게 보이긴 했으나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사임하려 하지 않았다. 특히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사임 압력에 반대하는 칙령을 내릴 정도로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성직자단은 더 이상 교황들 때문에 분열 사태를 지속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1398년 파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프랑스 성직자들은 베네딕토 1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고 선언한다. 구체적인 행동으로써 그해 지오프리 부시코(Geoffrey Boucicaut)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아비뇽 교황청을 포위하여 5년간 베네딕토 13세의 발을 묶어놓았다. 위신을 잃은 베네딕토 13세는 1403년 아비뇽 교황청을 탈출해 나폴리 왕이자 앙주(Anjou)의 공작인 루이 2세(Louis II)에게 몸을 의탁하여 일시적으로 교황의 권한을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추락하는 아비뇽 교황의 위세를 멈출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406년에 로마에서 80세의 나이로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12세(Gregorius XII: 1406-1415)는 수위권을 가지는 교황이 아닌 다른 이들에 의해 교회의 일이 좌지우지 될 것을 크게 염려하였다. 그는 처지가 곤궁한 상태에 놓인 베네딕토 13세에게 연락하여 문제 해결에 대한 의견을 서로 교환하고자 1407년에 회담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회담 장소에 이견이 있어서 베네딕토 13세는 사보나(Savona)에, 그레고리오 12세는 루카(Lucca)에 도착한 뒤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베네딕토 13세의 숨통을 사실상 끊어놓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프랑스의 왕 샤를 6세(Charles VI)가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면서 정권은 사실상 왕의 종친인 부르고뉴(Bourgogne)의 공작 필리프 2세(Philp II) 및 그의 아들 장 2세(Jean II)에게 넘어갔고, 이를 시기하고 비방한 오를레앙(Orléans)의 공작이자 왕의 동생이었던 루이 1세(Louis I)가 파를 이루어 권력 다툼을 하게 되었다. 필리프 2세를 비롯한 정부 중심 세력은 파리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그들은 1398년의 결정대로 베네딕토 13세를 거부했다. 이에 대항하는 루이 1세는 반대로 베네딕토 13세를 적극 지지했고 공개적으로 장 2세와 위협을 주고 받았다. 비록 정치적인 이유였지만 루이 1세가 바로 베네딕토 13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부르고뉴의 공작은 1407년 파리의 한 거리에서 루이 1세를 잔인하게 암살하는데 성공하였고, 베네딕토 13세는 마지막 믿었던 후원자마저 잃게 되어 교황으로서의 권력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그는 샤를 6세에게 서한을 보내 테러 행위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였으나 샤를 6세는 그 편지를 찢어버렸으며 오히려 1408년에 파리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베네딕토 1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최종 결의안을 채택, 로마와 아비뇽 두 교황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잉글랜드와 카스티야 왕국,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가 취했던 중립 노선을 따라 교회 분열을 해결하는 데 적극 동조하기로 했다.

루이 1세가 장 2세의 계략에 걸려 거리에서 암살당하는 것을 묘사한 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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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위의 공의회

한편 상황이 급변하는데도 불구하고 두 교황이 사태 해결을 위한 진전된 행동을 취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자, 이제는 추기경단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레고리오 12세를 따르던 추기경 중 일곱 명이 루카를 떠나 피사(Pisa)로 향했다. 두 명의 로마 추기경들이 그들 뒤를 따랐으며 아비뇽에서도 네 명의 추기경들이 이들과 뜻을 같이 하겠다고 선언하고 이내 합류하였다. 그들은 1409년 피사에서 공의회를 개최되었고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의회에 참석한 추기경은 24명으로 늘었다. 4명의 서방 총대주교들6과 10명의 대주교를 비롯해 수많은 성직자, 수도사, 기사단, 학자들이 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피사 공의회는 공의회 수위설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진 첫 번째 사례였다. 이 회의에서 공의회 수위설을 지지하는 학자들과 성직자들의 열띤 주장이 이어졌으며 프랑스의 대학들, 곧 파리, 툴루즈(Toulouse), 앙제(Angers), 오를레앙 대학에서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피사 공의회는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를 모두 '악명 높은 분열주의자들이자 이단자들로 신앙의 오류를 가졌으며 위증과 맹세를 어긴 심대한 죄를 가진 자들'로 정죄하면서 두 교황을 폐위하였고, 새로운 교황으로 알렉산데르 5세(Alexander V: 1409-1410)를 선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는 피사 공의회가 무효라고 선언하고 사임을 거부했다. 정확히 얘기하면 그레고리오 12세는 베네딕토 13세와 알렉산데르 5세가 사임한다면 자기도 지체없이 무조건 사임하겠다는 의견을 밝혔고, 베네딕토 13세는 페르피냥(Perpignan)에서 공의회를 연 뒤 피사 공의회를 개최한 성직자들과 협상하겠다는 태도를 내비쳤다. 이제는 합법적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세 명으로 더 늘었다!

이 때 헝가리의 왕인 지기스문트(Sigismund)가 해결사로 나선다. 그는 서방 교회의 분열 사태를 효과적으로 수습하여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고, 최종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데르 5세를 이어 피사 공의회 계열의 교황이 된 요한 23세(Ioannes XXIII: 1410-1415)가 로마 교황인 그레고리오 12세를 지지하는 나폴리 왕국의 왕 라디슬라오(Ladislao)에 의해 로마에서 쫓겨나자 피렌체(Firenze)에서 그를 만났고 거기서 지기스문트는 교황에게 공의회 개최를 요구한다. 적법한 교황으로 인정받길 원했던 요한 23세는 이탈리아 영토 내에서 공의회를 열길 희망했으나 요한 23세는 실권이 별로 없었고, 결국 지기스문트의 압력에 못 이겨 독일 남부의 호반도시인 콘스탄츠(Konstanz)에서 공의회를 열게 된다.7

지기스문트는 결국 1433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8

1414년부터 열린 이 콘스탄츠 공의회는 참석자가 무척 많아 기록에 따라서는 5만에서 10만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왕에서부터 거지까지 수많은 서방 교회 사람들이 다 모였다고 하는데 추기경만 33명, 다섯 명의 라틴 총대주교들, 47명의 대주교와 수많은 성직자들, 수도사들, 학자들, 그리고 세속 권력의 대표자들이 모였다. 이 회의는 피사 공의회보다 더 강하게 공의회 수위설을 밀어붙였다. 교회의 전체 모임인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고 그렇기에 교황을 심문할 수 있다는 내용의 교령이 반포되었다. 다음이 저 유명한 칙령 '하이크 상타 시노두스(Haec Sancta Synodus: 이 거룩한 회의)'이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모습. 사실 공의회 수의설에 의거한 분열 해소 외에도 이 공의회가 추인한 법령 중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를 단죄했다는 것이다. 그림 가운데 수도사 복장을 한 자가 얀 후스. 9
거룩하고 나뉘지 않는 삼위일체, 곧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멘. 콘스탄츠에서 열린 이 거록한 회의, 곧 분열을 끝내고 하느님의 교회의 수장과 구성원 간의 연합과 개혁을 위해 모인 이 공의회는 성령 안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소집되었으며, 교회의 연합과 개혁을 보다 쉽고 분명하고 생산적이며 자유롭게 이루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성직자를 임명하고, 정의를 내리며, 교령을 내리고, 구별하며, 선포한다.

먼저 성령 안에서 합법적으로 모인 이 공의회는 일반 공의회로서 이 땅 위에 사는 보편 교회의 신자들을 대표하며 그리스도로부터 그 권능을 즉시 받았음을 선포한다. 또한 어떤 지위나 존엄을 가진 자든지 심지어 교황일지라도 신앙, 앞서 말한 분열의 치유, 앞서 말한 하느님의 교회의 수장과 구성원 간의 전반적인 개혁에 관한 일이라면 공의회에 복종해야만 한다.

또한 선포하는바 어떤 상황이든, 어떤 지위나 존엄을 가진 자든지 심지어 교황일지라도 이 신성한 공의회나 아무 다른 합법적으로 결성된 일반 공의회가 앞서 말했던 일들 혹은 그와 관련된 일들에 관해서 결정한 과거나 미래의 위임 사항과 규칙, 법령, 교훈을 반항적으로 거부하는 자는 속죄를 해야만 하며, 만일 회개치 않는 경우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징계를 받을 것이니 필요하다면 법의 도움을 받아서까지라도 그리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거룩한 회의는 정의하고 정하노니 공의회의 숙고와 허가 없이 교황 요한 23세는 교황청과 행정부서 및 관료들을 콘스탄츠로부터 다른 도시로 옮기지 않을 것이며, 관료들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끔 직간접적으로 강요할 수 없다. 만일 교황이 과거나 미래에 이와 반대로 행동한다든지, 혹은 앞서 말한 관료들이나 공의회 관련 자들에 대항하여 어떠한 과정이나 위임 사항, 견책, 혹은 벌칙에 관해 맹렬히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때 그 모든 것들은 무가치하며 공허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어떤 과정이나 견책이나 벌칙이나 무가치하며 공허하고 복종할 것이 못된다. 관료들은 공의회가 열려 있는 기간 동안에는 모든 공무를 콘스탄츠 시에서 예전처럼 자유롭게 볼 것이다.

또한 이 공의회가 시작한 이후로 성직자들이나 성직록을 지급받는 사람들, 관료들과 관리자들의 근무지 이동과 폐위, 일시적 성직급의 폐지와 은사, 책망, 견책, 과정, 형벌, 그리고 교황 요한 23세나 그의 관료들 혹은 위원들에 의해 행해졌거나 행해질 모든 사목 행위들이 공의회나 공의회 관련자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지지자 및 참석자들에 반(反)하거나 편견을 심어주거나 하는 등 어떠한 식으로도 관련된 사람의 의지를 꺾는 그런 행동이 벌어졌거나 혹은 벌어지게 될 것이라면 이 신성한 공의회의 권위에 따라 없던 일이 될 것이고, 파기될 것이며, 무효화되며 공허한 것이 곧 된다. 어떠한 효과도 동력도 가지지 못할 것이니 공의회가 그 모든 것들을 무효화하고 없던 것으로 만들어 버리게 될 것이다.

또한 선포하노니 이 신성한 공의회에 소환된 교황 23세와 성직자들, 그리고 다른 교회 관계자들과 참석자들은 앞서 말한 공의회들에서 명백히 그래왔던 것처럼 완전한 자유를 누려왔고 또 누린다. 반대자들과 앞서 말한 소환된 사람들은 예외이다. 이 신성한 공의회는 하나님과 만민 앞에서 증언하는 공의회이다.

한편 공의회를 통해 적법한 교황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요한 23세는 어이없게도 공의회에서 성직 매수와 관련된 일로 단죄받게 된다. 그는 공의회 도중 일방적으로 퇴위를 선언하고 오스트리아 공작인 프리드리히 4세(Friedrich IV)의 영토로 피신하지만 콘스탄츠 공의회는 어차피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고 선언한 공의회였으니 교황의 참여 여부와 상관없이 공의회 활동을 지속했다. 공의회는 세 차례 요한 23세를 소환하지만 요한 23세는 이에 불응하였다. 이 사실을 안 지기스문트는 대노하여 프리드리히의 영토와 재산을 몰수하였고, 결국 요한 23세는 공의회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레고리오 12세는 1415년에 서한을 보내 사임을 천명하였고, 그는 교황에서 폐위되었으나 주교급 추기경으로 임명되어 짧은 여생동안 봉직하였다.10 이와는 반대로 아비뇽 교황인 베네딕토 13세는 끝까지 사임을 거부했다. 그는 스페인 발렌시아(Valencia) 근처에 페니스콜라(Peñiscola)라는 산골짜기에 숨어 콘스탄츠 공의회를 부정하고 자신만이 서구 대이교가 일어나기 전 시점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는 유일한 추기경이자 적법한 교황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도 1417년에 공의회에 의해 폐위되었고, 이 마지막 아비뇽 교황에게 충심을 보였던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도 베네딕토 1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콘스탄츠 공의회는 이렇게 세 명의 교황들을 일거에 모두 정리하였고 공의회 수위설이라는 강력한 사상을 근거로 하여 모든 분열 상황을 해소하는 데 성공하였다. 마지막 남은 일은 서방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수장을 새로 세우는 일이었다. 통일 교황으로 선출된 사람은 이탈리아 유력 가문인 콜론나(Colonna) 가문에 속하는 추기경 오도네 콜론나(Oddone Colonna)였으며, 그는 마르티노 5세(Martinus V: 1417-1431)의 이름으로 교황이 되었다. 서방 교회의 대혼란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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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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