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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2-10

Religion 2-10

동서교회 대분열 10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10

대분열의 전조
Toward the Great Schism


목차

  1. 두 세르기우스의 분열
  2. 교황 레오 9세
  3. 참고 사이트 및 출처

두 세르기우스의 분열

9세기 말부터 11세기까지 동서교회의 수장(首長)들은 모두 세속 권력에 휘둘리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콘스탄티누폴리스 세계총대주교는 당시 번영을 누리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의 의지에 의해 임명되었고 간혹 폐위되기도 하였다. 서방 교회의 상황은 더 끔찍했다. 이탈리아를 좌지우지한 테오필락투스(Theophylactus) 및 크레센티우스(Crescentius) 가문의 전횡으로 교황의 삶은 비참해졌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및 서유럽의 경쟁자들의 권력 쟁탈전 밑에서 교황들은 그들의 이익에 맞춰 춤을 추는 광대 노릇을 해야 했다. 비록 교황의 수위권과 위엄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끔찍한 재위기간을 보내야 했다. 이 기간 중에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 서방교회에서는 성직 매매를 비롯하여 성직자의 혈연 관계에 있는 사람이 주요 교회권력을 독점하는 족벌주의(族閥主義, nepotism) 등 갖가지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서교회는 일치를 위한 대화를 잠시 접어두고 각자 행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세계총대주교 니콜라오스 1세. 그의 별명은 미스티코스(Μυστικός)였는데 이는 그가 황제를 보필하는 비서실장 혹은 고위 관료직을 맡았기 때문이다. 1

대분열의 징조는 창부정치(pornocracy)의 시작을 알린 세르지오 3세(Sergio III: 904-911)로부터 시작되었다. 907년 랭스(Reims) 대주교였던 헤르베우스(Herveus)에 의해 열린 주교 회의에서 그는 니카이아-콘스탄티누폴리스 신경에 필리오케 문구를 삽입하는 것을 옹호하였고 이를 반대하는 동방 교회의 입장을 불경스러운 신성 모독으로 간주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이 당시 비잔티움 황제였던 레온 6세(Λέων ΣΤ΄)의 네번째 결혼을 승인함으로써, 이를 신학적 이유로 반대하다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좌에서 폐위된 니콜라오스 1세(Νικόλαος Α΄: 901-907, 912-925)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니콜라오스 1세는 9편에서 소개한 포티오스 1세(Φώτιος Α': 858-867, 877-886)와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그가 폐위당하자 서방 교회를 경계하고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는 동방 교회 세력들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생겨난 불만은 기어이 100여년이 지난 뒤 터지게 된다.

때는 1009년의 일이었다. 로마로부터 날아온 편지 하나가 동방 교회를 뒤숭숭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 교황좌에 오른 세르지오 4세(Sergius IV: 1009-1012)는 자신의 등극을 비잔티움 제국에 알리는 편지에 필리오케 문구가 삽입된 시노디콘(Συνοδικον)을 첨부하였다. 이 때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는 세르요스 2세(Σέργιος Β΄: 999-1019)였는데, 그는 포티오스의 조카였고 매우 교육을 잘 받은 수도사 출신이었다. 세계총대주교라는 이름을 빈번히 사용했다고도 여겨지는 그는 세르지오 4세가 보낸 편지를 너무나도 불쾌하게 여겼고, (포티오스가 주재했던) 제8차 세계 공의회의 결정을 상기하라면서 세르지오 4세의 시노디콘은 위법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불평을 늘어놓는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과감한 행동을 취했는데, 바로 세르지오 4세의 이름을 제단 이면화(diptych)에서 삭제한 것이었다. 이는 로마 교회, 더 나아가 그의 수위권을 믿고 따르는 서방 교회와의 통교를 끊겠다는 뜻이었고 실질적인 동서교회 대분열의 시작이었다. 교회사에서는 당시 동서교회의 수장이 모두 같은 이름2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분쟁을 '두 세르기우스의 분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결국 세르지오 4세 사후 우리가 8편에서 살펴봤듯이 그 뒤를 이어 교황좌에 즉위한 베네딕토 8세(Benedictus VIII: 1012-1024)에 의해 필리오케 문구 삽입은 서방교회의 공식 고백이 되고 말았다.

더 큰 문제는 세르요스 2세 이후 황제 바실리오스 2세(Βασίλειος Β΄)에 의해 세계총대주교로 임명된 에프스타시오스(Ευστάθιος: 1019-1025) 때 일어났다. 1024년에 베네딕토 8세가 선종하고 그의 형제인 로마누스(Romanus)가 하루만에 모든 서품을 받고 교황 요한 19세(Ioannes XIX: 1024-1032)로 등극한다. 이 때,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는 사절단을 로마로 보내게 되는데, 에프스타시오스는 이를 통해 세계총대주교의 직함을 서방 교회의 반발 없이 앞으로도 영구히 사용할 수 있을 것과, 동방 지역의 교회에 대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관할권을 정식으로 인정받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사절단을 통해 이득을 얻고자 했던 것은 세계총대주교뿐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황제 바실리오스 2세였다. 그는 이전부터 비잔티움 제국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궁지에 몰아넣었던 불가르족에 대한 대대적인 정복전을 개시하였고 1018년에 끝내 불가리아를 제국에 합병시키는데 성공한다.3 또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الفاطميون)의 침략에 대응하여 기독교 세계에서 중요한 도시였던 안티오키아와 라오디키아(Λαοδίκεια)를 지켜낸다. 이후로 바실리오스 2세의 관심은 온통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Sicilia) 섬에 집중되었는데, 특히 902년 튀니지에서 건너온 무슬림인 베르베르(Berber)인들에 의해 점령된 시칠리아 섬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여전히 제국이 영유권을 확보하고 있었던 이탈리아 남부에 대한 권리를 흔들림 없이 확보하는 게 매우 중요했다. 실제로 이탈리아 남부는 성상파괴론자였던 레온 3세(Λέων Γ')의 칙령 이후로 계속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구에 속해있던 지역이었다. 만일, 에프스타시오스가 요한 19세와의 협상에서 성공하고 돌아온다면 이는 콘스탄티누폴리스가 이탈리아 남부를 실효적으로 지배한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었고, 그렇다면 바실리오스 2세의 시칠리아 공략은 보다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터였다.

바실리오스 2세 치세 기간 중 비잔티움 제국의 판도. 제국의 영토는 유스티니아노스 1세(Ιουστινιανός Α') 이후 최대였다. 4

그러나 이 일은 뜻대로 진행되지 못한다. 에프스타시오스는 동방 총대주교들은 그들의 영역에서(in suo orbe), 그리고 교황은 전 세계에서(in universo) 으뜸가는 치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존중함과 동시에 동방 총대주교의 권위가 인정될 수 있는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요한 19세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온 사절들이 가져 온 진귀한 선물에도 불구하고 동방 교회를 경계하는 수많은 서방 교회 성직자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쓸 수는 없었기에 이러한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부하였다. 결국 에프스타시오스는 전임자처럼 로마 교황의 이름을 제단 이면화에서 삭제한 채 그대로 두었다. 단지 한 가지 진전이라고 할 것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동방 교회의 전례를 인정해 주는 대신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도 서방 교회의 전례를 인정해주는 교회를 설립할 것에 동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 교회 일치에 전혀 도움이 되지는 않은 조치였다. 오히려 동방 교회의 중심에서 행해진 서방 교회의 라틴 전례는 동방 교회의 성직자들의 비난을 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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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9세

한편 서방 교회는 베네딕토 9세(Benedictus IX: 1032-1044, 1045, 1047-1048)에 이르러 극심한 혼란 상태에 다시 빠지게 된다.5 결국 교회 개혁의 의지를 가졌던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는 그를 폐위하고 다마소 2세(Damasus II: 1048)를 교황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가 말라리아 때문에 23일만에 사망하자 가까운 친척 사이었던 독일인 브루노(Bruno)를 교황좌에 앉혔는데, 그가 바로 교회 대분열의 서방 교회측 인물인 레오 9세(Leo IX, 1049-1054)이다. 레오 9세는 부패에 찌든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짧은 재위 기간 중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주교 회의를 개최하여 성직자들의 독신을 강조하여 차부제(次副祭, subdeacon)까지도 독신을 지킬 것을 명했다. 또한 사제의 축성에 의해 빵과 포도주가 문자 그대로 실제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을 반대한 베렝가(Berengar)를 단죄하였고, 성직 매매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고자 수많은 지역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좌) 로마 가톨릭 교회와6 (우) 동방 정교회의 성만찬(Holy Eucharist)7 집전 모습. 두 교회는 화체설을 정식 교의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외부에서 불거지게 된다. 시칠리아 섬의 주인이 베르베르인에서 노르만(Norman)인으로 바뀌는 상황이었다. 노르만인들은 11세기부터 점차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1047년에 노르만인의 수장인 드로고(Drogo)가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3세로부터 정식으로 '이탈리아 공작 및 아풀리아(Apulia)와 칼라브리아(Calabria)의 백작'의 작위를 받기에 이른다. 확대되는 노르만인의 영향력에 이 지역 원주민인 이탈리아인들의 적개심은 커져갔으며 심지어 로마를 방문하는 노르만 순례자들마저 집단 린치를 당할 정도였다. 교황령의 통치자이기도 한 교황 레오 9세 역시 커져가는 노르만인들의 세력을 저지할 방도를 찾고 있었다.

결국 교황은 1053년 주교 회의를 열어 노르만인을 대적할 군대를 창설하고 직접 전장에 나갔다. 여기에는 로렌(Lorraine)의 공작 제라드(Gérard)와 베네벤토(Benevento)의 공작 로돌포(Rodolfo)가 지휘 하에 슈바벤(Schwaben) 용병과 롬바르드인들도 합류했다. 그러나 치비텔라(Civitell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교황 연합군은 크게 패배하였고 교황이 포로로 사로잡히는 희대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결국 레오 9세는 노르만인들에 굴복했으며 감금당하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노르만인들의 세력 확장을 나타낸 지도. 노르만인은 1091년에 시칠리아 섬을 완전히 점령하였고, 이탈리아 남부의 패권을 장악한 뒤 1130년 시칠리아 왕국(Regno di Sicilia)을 선포하였다. 8

한편 이 전쟁의 결과는 비잔티움 제국 역시 위기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유스티니아노스 1세의 정복 이후 5세기만에 이탈리아 남부에서의 패권을 노르만인들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비록 비잔티움 제국이 급속히 그리스화되어 이탈리아를 비롯한 라틴 세계와는 많이 달라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제국의 시민들은 자신들을 로마인으로 부르곤 했으며 바로 남부 이탈리아가 과거 로마 제국의 역사와 영광을 현재 비잔티움 제국과 연결해주는 매우 의미있는 땅이었다. 때문에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9세(Κωνσταντίνος Θ΄)는 교황과 연대하여 노르만인들을 이탈리아 남부에서 몰아내기 위해 협력할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러한 공조 노력은 동방교회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되었다. 동방교회의 성직자들이 종교적 이유를 들어 서방교회의 수장인 교황과의 군사적 협력을 완강히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완고하게 서방교회를 적대시했던 세계총대주교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가 동서교회 대분열의 동방교회측 인물인 미하일 1세(Μιχαήλ_Α΄: 1043-1059)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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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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