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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1
펜타르키아의 성립
Birth of the Pentarchy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세(Κωνσταντίνος Α΄)가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골자로 한 밀라노 칙령(Edictum Mediolanense)을 반포한 313년에야 기독교는 황제와 기득권층으로부터 받았던 무수한 박해를 딛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질고의 시간 속에서도 전부터 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 대도시를 거점으로 하여 바닥에서부터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 도시는 초기 기독교에 입교했던 유다인들의 주 활동지였던 동시에 이방인 선교 중심지였다. 대표적인 거점 도시 셋은 다음과 같았다.
한편 유다교의 성지이자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혀 죽은 예루살렘(Ιερουσαλήμ)은 비록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음에도 유다인들에게는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큰 도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유다교인 못지 않게 예루살렘을 거룩한 중심 도시로 여겨 왔다.
그런데 콘스탄티노스 1세 즉위 이후, 앞에서 열거한 네 도시(로마, 알렉산드레이아, 안티오케이아, 예루살렘)가 아닌 다른 한 도시가 기독교 세계의 또다른 중심지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그 도시의 이름은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이었다. 황제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던 막센티우스(Maxentius)와 리키니오스(Λικινιος)를 제치고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티노스 1세는 어지러워진 제국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동시에 동방으로부터 전해지는 찬란한 문화와 부를 중시할 목적으로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온으로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그는 비잔티온에 로마로부터 옮긴 수도라는 뜻의 ‘새로운 로마(Nova Roma)’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 도시는 콘스탄티노스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콘스탄티누폴리스(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12사도 중 하나인 안드레아가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운 뒤 X자형 십자가 위에서 순교했다고 하며, 성경에도 등장하는 스타키스(Στάχυς)가 이 도시의 주교직에 오르는 등2 콘스탄티누폴리스의 기독교 신앙은 1세기경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이와 같은 사도적 전승을 기반으로 하여 동방의 새로운 기독교 중심지로서 명성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종교적 중심지로 만들어 놓았던 그 사도적 전승을 곧이 곧대로 믿기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차라리 콘스탄티누폴리스가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종교적인 위엄까지 겸비하게 되었다고 여기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겠다.
자. 교회 이야기가 확대되기 전에 로마 제국 시기로 잠시 시간 여행을 해서 당시 교회 행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잠깐 이야기를 해 보자. 그 시대에도 현재 우리들이 신부(神父) 혹은 목사(牧師)라고 일컫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례를 집전하고 이끄는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그들 외에도 각양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곧 예언자와 선지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 집단적인 치리를 돕는 장로(長老)들, 그리고 교사들과 도우미들이 전례 봉헌자들과 함께 교회의 행정을 담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비대해진 교회를 효과적으로 치리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자연스럽게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통치 체제를 갖췄다고 생각되는 로마 제국의 행정 관료 체제의 형태를 차용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로마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 외의 지역에 갈리아(Gallia), 히스파니아(Hispania) 등의 속주(屬州, provincia)를 설치하고 행정 책임자인 총독을 파견하여 지배했다. 교회는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을 경계로 하여 교계 구역을 설정하고 성경에도 등장하는 성직인 주교(主敎, bishop), 사제(司祭, priest/presbyter), 부제/보제(副祭/補祭, deacon)3를 세워 교회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러한 체제를 감독제 교회(監督制敎會, episcopal church)라고 하며 이러한 방식이 초기 기독교 교회 행정의 근간으로 자리잡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금 더 살펴보자. 교회는 일종의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물이니까 교회에 상주하여 이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관할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들이 사제이다. 그런데 사제 혼자 이 모든 일을 감당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이들의 전례 봉헌을 돕는 이들이 임명되었다. 그들이 바로 부제이다. 그런 사제와 부제들이 하나의 교회의 행정을 책임지게 되므로 본당(本堂, parish church)이라고도 불리는 교회 건물 한 채는 기독교 행정 단위 중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한편 한 지역에는 거주민들의 생활 영역을 적절히 나눠 가지는 다수의 교회들이 있는데 이 교회들이 함께 이루는 영역 단위를 교구(敎區, diocese)라고 부른다. 교구에 속한 교회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치리를 대표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것이 바로 주교의 기원이 된다. 당시 주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사도들이었거나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 혹은 그들의 가르침을 전수받아 다른 이들에게 전해줄 만한 권위 있는 사제들이었다.
그런데 모든 지역이 평등하지는 않아서 어떤 지역은 다른 곳들에 비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더 중요하고 잘 알려진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에 설치된 교구는 특별한 위상을 인정받아 대교구(大敎區, archdiocese)라고 불렸다. 한편, 교구들은 서로 묶여 관구(管區, province)를 형성했고, 이 관구를 책임지는 사람은 관구에 속한 교구의 주교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관구장주교 혹은 수도대주교(首都大主敎, metropolitan)라고 불리는 이들 주교들의 주교좌는 주로 로마 속주나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 그리고 지역 대도시에 있었다.5
앞서 언급한 도시들 중에서 로마, 알렉산드레이아, 안티오케이아는 수도대주교좌가 설치될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춘 도시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도시에 착좌(着座)한 수도대주교들은 여러 수도대주교 중에서도 더 으뜸가는 중요한 주교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이들 도시의 주교좌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창건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사도좌(使徒座, apostlic see)로 불리며 중시되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주교좌를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가, 알렉산드레이아의 주교좌를 비록 성경에서 사도로 기록되지는 않으나 사도의 권한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사도 마르코가, 그리고 안티오케이아의 주교좌를 사도 베드로가 세웠다는 사실은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 두루 진실로 받아들여진 것들이었다. 이 세 도시의 주교는 주변 다른 주교의 관할 하에 있는 성직자들에 대해서도 강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는데, 이를 암시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로마의 주교, 곧 교황(敎皇)이었던 클레멘스 1세(Clemens I: 88-97)가 코린토스(Κόρινθος) 지역의 성직자를 파문(破門)하기 위해 쓴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6 이것은 이미 1세기부터 로마 주교의 영향력이 주변에 미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공공연한 영향력은 콘스탄티노스 1세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관한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325년에 소집한 니카이아(Νίκαια) 공의회(제1차 니카이아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인정되어 명문화되었다. 공의회가 추인한 법령 6조에서 이들 세 도시의 주교들이 주변 지역 교회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분명히 명시한 것이다. 이때부터 이들 지역의 주교들은 일반적인 대주교와 수도대주교를 능가하는, 이른바 총대주교(總大主敎, patriarch)로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7 물론 총대주교라는 명칭이 실질적으로 쓰인 것은 더 훗날의 이야기지만 4세기경부터 이들 로마, 알렉산드레이아, 안티오케이아의 대주교는 지금 개념의 총대주교로 사목 활동을 하며 넓은 지역의 교회 우두머리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총대주교좌의 개수에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기독교를 아예 국교(國敎)로 선포한 테오도시오스 1세(Θεοδόσιος Α΄)는 381년에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공의회(제1차 콘스탄티누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그는 여기서 매우 논란이 되는 결정을 이끌어 내었다. 바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주교가 로마의 주교 다음의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선언은 콘스탄티누폴리스 주교를 총대주교격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는데 이를 통해 콘스탄티누폴리스 주교좌가 사도 안드레아가 창건한 사도좌로서의 종교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는 이러한 선언을 통해 로마, 알렉산드레이아, 안티오케이아, 예루살렘에 비해 역사가 한참이나 짧은 이 풋내기 도시의 권위를 훨씬 드높였다.
로마 교회는 황제의 선언에 반발했다. 당시 로마의 주교(이하 교황)였던 다마소 1세(Damasus I, 366~384)는 공의회에 초대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동의와 참석 없이 그런 결정을 함부로 내릴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제1차 콘스탄티누폴리스 공의회가 추인한 법령이 사도 베드로를 교회 권위의 최고로 두었던 로마 교회의 입장과는 대립되는 결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베드로가 가장 높은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교회의 반석이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주교좌만이 참된 권위가 있는 총대주교좌라고 생각했다. 앞서 소개했듯 로마와 안티오케이아는 사도 베드로와 관련되어 있었고, 알렉산드레이아 주교좌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마르코는 베드로의 제자였다.9 더 나아가 로마 교회는 다음 장부터 자세하게 소개될 로마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papal supremacy)을 주장했는데, 이는 로마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모든 보편 교회를 통치하는 우두머리라는 사상이었다. 비록 사도 안드레아가 베드로의 동생이긴 하더라도, 그의 사도좌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천국 열쇠를 위임 받은 수위권의 상징인 베드로의 사도좌를 능가하거나 혹은 대등한 입장에 설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주장과는 달리 앞선 두 공의회가 개최된 이후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종교적 영향력은 더욱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선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옛 로마 세력을 따돌리길 원했던 황제와 신흥 정치 세력의 강력한 비호를 받았다. 또한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로마와는 달리 동방 그리스 지역에 있던 도시였기에 과거 찬란했던 헬레니즘 문화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황제가 주도하는 공의회의 개최 지역과 가깝다보니 이 지역의 성직자들은 보다 활발하게 세속 정권과 밀접하게 교류하며 신학적인 논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점차 동방 세계의 기독교 중심지로 성장했다.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주교로서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모스(Ιωάννης Χρυσόστομος), 나지안조스(Ναζιανζός)의 그레고리오스(Γρηγόριος)와 같은 영향력있는 교부(敎父)들도 교회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부상은 451년 칼케돈(Χαλκηδών) 공의회에서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입증되는데 여기서부터 로마와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된다.
칼케돈 공의회는 433년에 열렸던 에페소스(Έφεσος) 공의회에서 단죄한 네스토리오스(Νεστόριος: 428-431)의 이성론(二性論, Nestorianism)을 보다 확실하게 거듭 단죄하기 위해 28개의 법령을 제정하여 공포하였다. 갈등의 발단은 마지막 법령인 28조였다. 거기에는 로마 교회에 주었던 특권을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에도 동등하게 부여하겠다는 내용과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를 로마 교회 다음의 서열에 두겠다고 재차 선언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로마 교회는 여기에 다시 격렬히 반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 나온 동등한 특권(ίσα πρεσβεία)이란 표현은 381년 콘스탄티누폴리스 공의회 법령의 표현보다 더 과감한 표현이었다. 이 표현은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와 로마 교황이 가지는 특권이 질적으로 동등함을 뜻했으며 단지 로마의 총대주교인 교황은 전체 기독교를 대표하는 의장격의 명예상 지위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했다. 즉, ‘동등한 것 중에 먼저 된 것(πρώτος μεταξύ ίσων / primus inter pares)’이라는 의미였다. 교황의 수위권, 사도 베드로의 지상권(至上權)을 신봉하는 로마 교회로서는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폴리스에 그러한 특권을 부여한 법령의 해석을 놓고 로마 교회는 더욱 격하게 분노했다. 법령은 과거 로마 교회가 그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가 단지 당시 로마가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는 수도를 옮겨 새로운 로마, 즉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모든 행정 중심과 원로원을 이전시켰으니, 이제는 콘스탄티누폴리스의 교회야말로 과거 로마 교회가 누렸던 특권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법령의 결론이었다. 언뜻 보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로마 교회는 여기에 격렬하게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앞서 밝혔듯 로마 교회는 자신들이야말로 사도 중의 으뜸인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천국 열쇠를 기반으로 세운 어머니 교회라는 확고부동한 믿음과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의 지상권을 올바르게 계승한 교회는 로마 교회뿐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로마 교회 사람들은 사도직과 천국 열쇠에 대한 고려는 무시된 채 단지 세속적 영향력에 따라 거룩한 성직의 서열이 좌지우지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교황 레오 1세(Leo I: 440-461)를 비롯한 로마 교회가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의 서열 격상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이 당연했다. 교황은 칼케돈 공의회의 법령 추인을 차일피일 미루며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성과를 거둔 칼케돈 공의회의 공(功)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교황 레오 1세는 문제가 되는 28조만 빼놓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작성한 신조와 나머지 법령을 453년이 되어서야 겨우 부분 승인하였다.
한편 승인된 법령 중에는 또다른 총대주교좌를 신설하는 결정이포함되어 있었다. 7차 회의 때 안티오케이아 주교는 페니키아와 아라비아를, 예루살렘 주교는 팔레스타인 지방을 관할하는 것이 합의되었는데, 이를 통해 예루살렘이 총대주교좌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1차 니카이아 공의회로부터 칼케돈 공의회까지 총 네 번의 세계 공의회(世界公議會, ecumenical council)가 개최되면서 로마 제국 내의 기독교의 행정 구역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11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총대주교좌 다섯이 확립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로마, 콘스탄티누폴리스, 알렉산드레이아, 안티오케이아, 그리고 예루살렘이었다. 이것이 소위 펜타르키아(πενταρχία, pentarchia), 5두체제인 것이다. 실제로 이들 도시의 주교에게 총대주교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동로마 제국의 위대한 황제로 일컬어지는 유스티니아노스 1세(Ιουστινιανός Α΄)이다. 그는 534년에 제정한 『신칙법(新勅法, Novellae)』에서 총대주교가 나머지 지역 주교들보다 위에 있음을 명확하게 밝혔다.
이러한 펜타르키아는 최종적으로 692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Ιουστινιανός Β΄)에 의해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열린 퀴니섹스툼(Quinisextum) 공의회라고 불리는 공의회에서 법령 36항을 통해 최종적으로 승인되었다.13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 세계의 완전한 동의를 기반으로 한 승인은 아니었다. 이 퀴니섹스툼 공의회에 소집된 주교들은 모두 동방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었던 반면 로마 교회를 비롯한 서방 세계에서는 아무도 초청받지 못했으며, 적법한 교황의 특사 역시 이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교황이었던 세르지오 1세(Sergius I: 687-701)는 교황이 참석하지 않은 공의회가 추인한 법령들이 권위가 없음을 들어 102개에 달하는 퀴니섹스툼 공의회 법령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에 화가 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라벤나(Ravenna) 총독으로 하여금 교황을 체포하여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압송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저지당하고 말았다. 로마 가톨릭은 퀴니섹스툼 공의회를 세계 공의회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오직 동방 정교회만이 이를 세계 공의회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는 로마의 교황좌와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세계총대주교좌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단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벌써 그리 성급하게 7-8세기로 건너가서 이야기를 진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로마와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대결이 공의회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행정 구역이 확립되는 시기에 기독교 세계를 그래도 강하게 묶어주던 로마 제국이 쇠퇴하게 되면서 동서교회의 갈등은 또다른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제 펜타르키아를 설명하였고, 동서 교회의 두 축인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에 대해 간략히 소개를 했으니 공의회를 바탕으로 주인공들을 소개하는 것은 이쯤에서 해두고 본격적으로 두 교회의 역사를 따라가 보겠다. 아주 긴 여행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