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은행에 대출 상담을 받으러 갔다가 대기 중에 잠시 궁금해져서 검색을 해 보았다. '대출'의 뜻이 무엇인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대출2(貸出)「명사」 돈이나 물건 따위를 빌려주거나 빌림. 


그런데 의문이 든 게, 이 한자어의 첫 글자 貸를 일컬어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施也。즉, '주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이 한자는 재물을 베푸는, 다시말해 '빌려주는' 행위를 의미하는 한자이다. 게다가 뒷글자 出은 '나간다'는 뜻이므로 貸出은 '빌려 나간다'라고 해석할 수 있으니, 결국 이 단어는 재물을 가지고 있는 측이 쓰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우리말에서는 위 사전의 정의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 단어를 빌려주는 쪽뿐만 아니라 빌려받는 쪽에서도 흔하게 쓴다. 


예1) 요즘 대출 권하는 광고가 너무 많은 거 아니니? 

예2) 돈 없으면 대출해서 투자해! 

예3) 나 이번에 금리 좀 깎아서 대출했어. 

예4) 아까 도서관에 들러서 재미있어 보이는 소설을 대출했다. 


금융권에서 돈을 빌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대출받다'라는 표현 역시 많이 쓰이지만 특히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대출하다'가 압도적으로 쓰이는 실정이다. 이것은 잘못된 언어사용례라고 할 수 있을까? 기준이 되는 국어대사전이 이런 사용법을 허용하고 있으니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는 느낌은 어찌 막을 수가 없다. 


사실 이 대출(貸出)이라는 단어에 완벽하게 대응하는 반댓말이 있으니, 바로 차입(借入)이다. 이 한자어의 첫 글자 借는 貸와 반대로 '빌려 받는' 행위를 의미하며, 뒷글자 入은 '들어온다'는 뜻이므로 借入은 '빌려 들어온다'라고 해석할 수 있으니, 이 단어는 재물을 빌려받는 쪽에서 쓰기에 알맞은 단어이다. 국어대사전 역시 다음과 같이 뜻풀이를 하고 있다. 


차입1(借入)「명사」 돈이나 물건을 꾸어 들임. 


따라서 위에서 든 예를 다음과 같이 바꿔 쓰는 게 '원칙적으로는' 옳아보인다: 


예1) 요즘 차입 권하는 광고가 너무 많은 거 아니니? 

예2) 돈 없으면 차입해서 투자해! 

예3) 나 이번에 금리 좀 깎아서 차입했어. 

예4) 아까 도서관에 들러서 재미있어 보이는 소설을 차입했다. 


문제는 이런 표현들이 실제 한국어를 입말로 쓰는 화자들 사이에서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차입이라는 단어는 보통 가정 경제를 넘어서는 영역의 회계 및 경영에 주로 쓰일 법한 전문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용어라서 선뜻 사용하기를 주저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난맥상이 생긴 것은 아마 단어의 기원이 모두 일본어에서 쓰이는 한자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쿠리가나(送り仮名) 없이 쓰면 일본어로 대출은 貸出(かしだし), 차입은 借入(かりいれ)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이 한자어를 훈독(訓讀)하는데, 이는 마치 한국인이 貸出, 借入이라는 단어를 보고 '빌려줌', '빌림'이라고 읽는 것과 같다. 한국어에는 이러한 훈독은 거의 사라지고 음독(音讀)만 남았기 때문에 각각 대출, 차입이라고 읽는 것인데 만일 이 습관을 그대로 가져다가 일본어에서 해당 단어들을 음독하여 「たいしゅつ」, 「しゃくにゅう」라고 읽는다면 일본인들은 전자는 대출이 아닌 퇴출(退出)로 인식할 것이고, 후자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의아해할 지도 모른다. 


화폐 경제가 일본에 비해 한참 뒤떨어져있던 조선에 일본의 금융 시스템이 이식되면서 관련 용어들은 모두 일본식 한자어로 채워졌다. 그나마 '오함마(大ハンマー)'나 '헤베(平米)'같은 일본식 발음이 노골적으로 쓰이는 건축 분야보다야 덜 하다지만, 이쪽 분야도 들여다보면 뭔가 품위 있는 한자어처럼 보일뿐이지 뜯어보면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로 가득한 것을 알 수 있다. 잔고(殘高)라든지, 보합세(保合勢)라든지. 옛날에는 계좌(計座)라는 말 대신 구좌(口座)라는 말도 많이 쓰였다. 아무튼 貸出, 借入이라는 단어가 조선에 유입되었을 때, 일본인들이 저것을 훈독하든 음독하든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조건 한국식 한자음으로 음독했을 것이고, 일본인들의 사용례를 따라 그대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훈독해서 읽는 한자어의 경우 일본어는 활용어미만 바꿈으로서 이를 동사로 바꿀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번에는 오쿠리가나를 같이 쓰자면 다음과 같다:


[명사] 貸し出 → [동사] 貸し出

[명사] 借り入 → [동사] 借り入れる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한자어로 된 명사를 동사로 바꾸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한자어 뒤에 '하다'라는 동사를 붙여야만 한다. 모든 한자어에 대해서 음독을 하기 때문에 활용어미가 없기 때문이다. 대개 일본에서 들여온 한자어 표현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예를 들어 '에누리'라는 뜻의 일본어 割り引き의 경우, 한국어에서는 '할인'으로 읽는데 이를 동사로 바꿀 때 일본어와 한국어에서는 다음과 같이 변한다:


일본어: [명사] 割り引 → [동사] 割り引

한국어: [명시] 할인 → [동사] 할인하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단어 대출, 차입이라는 한국어 명사가 동사로 변환한된 결과는 '대출하다', '차입하다'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탄생한 동사 한국어 동사 '대출하다'와 일본어 동사 「貸し出す」를 비교해보면, 한자를 통해 빌려주고(貸) 나가는(出) 의미가 대놓고 드러나는 일본어 동사와는 달리, 한국어 동사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빌려주고 빌려받는 것인지에 대한 느낌이 굉장히 옅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어 사전 고지엔(広辞苑)에서는 일본어 동사 「貸し出す」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金品などを外部へ貸す。(금품 등을 외부에 빌려주다.)


그리고 명사 「貸し出し」는 다음과 같의 정의하고 있다:


①銀行などが、貸付のために金銭を支出すること。(은행 등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기 위해 금전을 지출하는 것.) ②物品を他に貸すこと。(물품을 남에게 빌려주는 것.)


비록 사전적인 정의 및 용례에 국한된 것이긴 하지만, 한국어 단어 '대출'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와는 달리 일본어 사전에서는 대출이라는 행위란 빌려주는 사람에게서 빌려받는 방향으로 향하는 일방향적인 금품의 흐름에 대한 표현이다. 이러한 사항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원래 일본어 단어 貸出은 일방향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이었다. → ② 貸出이 한국에 전래되면서 한글로만 쓰이다보니 금품을 타인에게 잠시 이용하게 한다는 의미만이 강하게 남은 채 방향성의 의미는 상실되었다. →  결과적으로 한국어에서 단어 대출(貸出)은 양쪽 주체 모두가 빌려주거나 빌려받는 의미로 다 사용 가능한 단어가 되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현재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현재와 같이 돈을 빌리는 사람이 대출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틀린 게 아니다. 하지만 이런 속내가 있었다는 것쯤은 한 번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