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테인(CH₄) 분자의 결합을 설명할 때 보통 중심 탄소 원자의 s 및 p 오비탈의 혼성(hybridization)이 언급되곤 한다. 즉, 탄소 원자의 2s, 2p 오비탈 네 개가 합쳐진 뒤, 균등한 정사면체 꼭지점을 향하는 비대칭적 아령 모양의 sp³ 혼성 오비탈이 만들어지고, 이 오비탈들이 수소 원자의 1s 오비탈과 σ 결합을 이루어 정사면체의 분자구조를 가지는 메테인 분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저학년 학부생들 대상으로 하는 일반화학 및 유기화학 수업에서나 쓰이는 '반쪽자리' 설명일 뿐이다. 사실 현대 화학 결합 개념은 비편재화(delocalized)된 분자 오비탈(molecular orbital)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 설명에 따르면 각 원자의 오비탈들은 대칭성에 맞게 서로 결합함으로써 선형 결합(linear combination)에 해당하는 분자 오비탈들을 만드는데, 이들 분자 오비탈들은 원래 원자 오비탈 상태보다 에너지가 낮아질 수도, 높아질 수도, 혹은 같을 수도 있다. 각각을 결합 오비탈(bonding orbital), 반결합 오비탈(antibonding orbital), 그리고 비결합 오비탈(non-bonding orbital)로 부르는데, 쌓음 원리(Aufbau's principle)와 파울리 배타 원리(Pauli exclusion principle)에 의거하여 전자를 하나씩 채웠을 때 결합 오비탈에 전자가 많이 들어가게 되면, 그러한 결합은 유효하게 이뤄져서 원자 상태로 유리되어 있을 때보다 더 안정한 분자를 형성한다.


이러한 설명에 따라 메테인 분자의 결합을 설명하면 탄소의 2s 오비탈 1개와 2p 오비탈 3개, 그리고 수소의 1s 오비탈 4개는 서로 대칭성에 맞게 구성되어 총 8개의 분자 오비탈을 형성한다. 이 중 a₁ 대칭성을 가지는 분자 오비탈이 1+1개, t₂ 대칭성을 가지는 분자 오비탈이 3+3개 형성되고, 이 중 결합 오비탈 네 개에만 전자 8개가 차곡차곡 들어가므로 탄소 원자 1개와 수소 원자 4개는 함께 모여 꽤나 안정한 메테인 분자를 형성한다. (메테인 분자가 앞서 설명한 탄소의 sp³ 혼성 오비탈과 수소의 1s 오비탈 사이에 형성된 네 개의 동등한 결합으로 이뤄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메테인의 이온화 에너지가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온화 에너지가 둘이라는 뜻은 제거 가능한 전자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에너지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완벽한 비편재화된 오비탈 이론으로 설명 가능하다.)


그런데 화학에 처음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자세한 양자역학 이론을 소개하며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들의 결합을 설명하려고 했다면, 아마 대부분 고개를 저으며 화학을 포기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중고등학생들이나 학부 저학년생들에게는 루이스 전자점식이라든지, 원자가 껍질 전자쌍 반발 이론(valence shell electron pair repulsion theory, VSEPR)이라든지, 혼성 오비탈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이용해서 쉽게 화학 결합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웬만한 화학결합은 그런 초급 수준의 19세기에 화학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던 그런 초급 수준의 화학 이론들로도 곧잘 설명이 쉽게 된다. 그래서 유기화학에서는 혼성 오비탈 개념을 써서 많은 결합을 설명 및 예측하며, 어느 누구도 그런 표현을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반쪽자리' 설명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은 사실 물리학자들이다. 물리학 수업을 들을 때 온갖 수식을 사용하여 전자의 파동 함수를 설명하던 물리학 교수들도 분자가 나오는 순간 ㅡ 그게 심지어 가장 간단한 원자인 수소 원자를 두 개 서로 붙여 만든,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분자인 수소 분자(H₂)였음에도 불구하고! ㅡ 논의를 재빠르게 거둬들였다. 대체로 물리학자들이 화학에서 다루는 분자를 바라보며 떠올리는 생각은 이런 식이다: 그런 존재들은 계산 능력만 충분하다면야 이론적으로 다 파악 가능하지만 너무 지저분하게 복잡하다! 그래서 물질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주로 단순화가 가능하면서 아름다운(?) 수식으로 표현 가능한 결정(crystal)들이었다. 결정은 무한하게 연결된 집단이지만 규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치 공간(position space)이 아닌 운동량 공간(momentum space)의 표현법으로 아주 간단하고(?) 미려하게(?) 표현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핵자기공명(nuclear magnetic resonance, NMR) 분광법은 현재 화학 분석법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사실 NMR의 탄생에 기여한 것은 모두 물리학자들이었다. 관련된 현상을 보고한 사람들만 해도 이시도어 라비(Isidor Rabi), 펠릭스 블로흐(Felix Bloch), 에드워드 퍼셀(Edward Purcell) 등 노벨상을 수상한 쟁쟁한 물리학자들었으며, 세계 최초로 NMR 기기를 제작한 회사 Varian의 리더들 중에는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NMR의 원리를 설명할 때 전자의 스핀 자기 모멘트(spin magnetic moment)라든지, 라머 진동수(Larmor frequency)라든지, 펄스파의 푸리에 변환(Fourier transformation)이라든지 이런 내용이 빠져서는 곤란하다. 특히 NMR 피크의 갈라짐이라든지 핵 오버하우저 효과(nuclear Overhauser effect, NOE) 등에 대해 논하려면 온갖 물리학적 고찰이 필수적이다. 모든 분석기기가 그렇지 않은 것이 있겠느냐만, 사실 NMR도 온통 물리학 수식으로 가득한 기계이다 ㅡ 생각해보니 내게 도전정신을 언급하시어 물리학을 전공하도록 유도한 유인석 교수님도 박사학위 주제가 NMR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 수많은 물리학적 원리는 거의 고찰하지 않더라도 NMR 데이터는 깔끔하게 해석 가능하다. 예를 들면, 왜 공간에서 tetramethylsilane (TMS)의 수소 원자보다 neopentane의 수소 원자가 더 downfield에서 피크를 나타내는가? 물리학자들이 이를 설명하려면 아마 한숨을 쉬며 앞에서 언급한 (지저분한) 분자 오비탈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TMS나 neopentane 내에 형성된 분자오비탈은 분자 내에서 비편재화된 전자의 확률 분포를 나타내는데, 메테인처럼 전자들이 짝을 지어 들어가 있는 결합 오비탈들을 보면 모두 TMS나 neopentane 분자에 전반적으로, 혹은 큼지막한 부분들에 전자의 발견 확률이 고르게 퍼져 있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고르게 퍼진 정도가 중심 원자가 탄소인 neopentane이 규소인 TMS보다 더 높다는 것이다. 규소는 3s와 3p 오비탈이 관여하고 있으니 크기가 커서 분자 오비탈의 크기도 크다. 그래서 TMS에 비하자면 neopentane 내에 속한 수소 원자의 경우 양성자 주변에 전자가 존재할 확률이 다소 낮아진다. 따라서 전자의 가리움 효과(shielding effect)가 감소하게 되어 downfield에서 공명이 일어난다. 사실 양자역학을 공부한 화학자라면 이런식으로 화학적 이동(chemical shift)이 설명되야 함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유기화학자라면 대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탄소의 전기음성도(electronegativity)가 규소의 전기음성도보다 높으므로 (2.55 > 1.90) 주변의 전자를 더 잘 끌어온다. 소위 유발 효과(inductive effect)에 따라 neopentane의 양성자 주변 전자의 밀도는 TMS의 그것보다 낮아지게 되고, 이때문에 가리움 효과가 감소하여 downfield에서 공명이 일어난다 (δ=0.90 ppm; singlet). 끝.


화학자들의 설명은 물리학자의 그것보다 훨씬 간단하다. 게다가 오비탈과 같은 복잡한 이론을 운운할 필요조차 없다. 화학식을 보고 전기음성도라는 개념 하나만 알고 있으면 쉽게 예측 및 설명이 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사고가 화학을 '분자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게 할 수 있었던 밑바탕이다. 물리학자들에게는 절대적인 수식을 통해 유도 가능한 물리량이 아닌 전기음성도는 임시방편적 구시대적 척도에 불과하지만, 화학자들에게는 여러 결합의 세기와 반응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도구를 제시해준다. 이뿐만인가. 물리학자들이 공액계를 가진 고리 화합물의 π 전자계 오비탈 에너지 위치를 표현할 때 흔히 사용하는 Frost circle을 보면 화학자들이 무슨 기하학적 마법진을 그리는 것은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록 휘켈(Hückel)의 양자역학적 계산을 다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에너지 위치만 제대로 표현하고 분자의 방향족성(aromaticity)을 설명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아, 물리학자들은 방향족성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결국 화학의 매력은 비록 엄밀하게 정의되지 않거나 반쪽자리에 불과한 임시방편적 도구들을 활용하더라도 그 나름의 질서와 서열을 구축함으로써 분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꽤나 다양한 현상들을 체계적으로, 보다 쉽게 설명해낼 수 있다는 데 있다. 때문에 화학자들은 종종 전자나 원자, 혹은 작용기(functional group)를 무슨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요소들처럼 그려내곤 한다. 물리학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존재들의 '의도'가 사실 수학적으로 기술된 물리학적 원칙에 따라 진행되는 숙명에 불과한 것이기에 화학자들의 이러한 태도가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물질의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고 이를 다른 변화에 적용하여 유용한 것들을 창조하는 데 열의를 보이는 화학자라면 물리학 수식의 길고 복잡한 1차선 도로에서 헤맬 것이 아니라 번듯하게 놓인 고속도로로 달려가기를 희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와 습관을 통해 물질의 변화를 빠르고 명쾌하게 이해하고 예측하는 것, 이것이 화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느끼는 희열일 것이다.


그런데 물리학자와 화학자 사이의 이런 관계는 화학자와 생물학자 사이에서도 기시감있게 연출된다. 화학자들 입장에서 보면 생물학에서 다루는 모든 생명 현상들은 다소 거대한 분자 혹은 그들의 집합체들간의 화학 반응일 뿐이다. 다만, 그 분자나 집합체의 크기가 워낙 크다보니 이것을 화학적인 논리로 해석하고 이해하기에는 부담감이 큰 것이다. 내가 생명과학을 전공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아마도 분자생물학자들은 생명과학의 가르침에서 기인하는 어떤 특별한 공통적 기질을 통해 화학자들이 느끼는 이런 부담감을 간단하게 넘어서는 어떤 통찰력이 있음에 틀림없다. 가끔 생명과학자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은 생분자들을 아예 작은 생명체로 보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이러한 사고에 대해 불편함을 느낄 법한 화학자들의 심정이 곧 전기음성도를 사용하는 화학자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물리학자들의 심정과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