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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e Art 2

유화와 화학

물감의 역사
History of Paints


목차

  1. 벽화
  2. 전색제의 발전
  3. 아크릴 물감의 탄생
  4. 참고 사이트 및 출처

벽화

구석기 시대 인류의 대표적인 주거지가 동굴이었다는 사실을 굉장히 널리 알려져 있다. 동굴의 실내 온도는 인간이 살기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인간은 그 동굴에서 맹수와 천재지변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숨길 수 있었다. 현대에는 인류의 힘으로 ― 혹은 인류가 사용하는 온갖 도구의 힘으로 ― 수많은 동굴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지만 고대인들이 그렇게 동굴을 파 낼 능력은 없었기에 그들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을 거처로 이용해야만 했는데 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들 중 우리가 눈여겨 볼 곳은 바로 석회암 층의 침식으로 형성된 석회 동굴이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지금 당신이 구석기 시대에 살았던 선사 시대의 우리 조상 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어제 사냥을 충분히 해서 먹거리는 충분하고 애들은 동굴 밖 어디 근처에서 사촌들과 함께 뛰놀고 있다. 하루하루 먹을 것을 찾느라 고생하던 당신은 오랜만에 초원을 뛰어다니는 동물을 향해 투창을 할 필요가 없는 매우 나른한 오후를 만끽하고 있다. 동굴 안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중 밖에서 뛰어놀던 당신의 딸 하나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동굴에 들어오더니 동굴 벽에 몸을 문대기 시작한다. 그걸 본 할머니는 아이가 못마땅한듯 혀를 끌끌차며 아이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개울가로 애를 씻기러 나간다.

그런데 당신,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진다. 동굴 벽에 아이가 문댄 흙먼지가 묻어있는데 아이의 자그마한 손바닥 모양이 그대로 남아있다. 생계활동과 무관한 휴식을 취하며 자유를 누리는 당신에게 갑작스런 예술가적 기질이 발동하기 시작했고, 아이가 뛰놀던 곳으로 나가 흙을 조금 퍼와서는 손끝에 흙을 묻혀 축축한 석회동굴 벽에 묻혀본다. 오! 흙이 벽에 붙어있다. 동굴 벽화 탄생의 순간이다.

틈만 나면 동굴 벽에 흙을 묻히던 당신은 많은 시행착오 끝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낸다. 흙 알갱이 크기가 작을수록 동굴 벽화에 잘 붙어 있더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당신은 뗀석기의 위력을 십분 활용하여 무른 돌멩이와 황토, 그리고 숯검댕이를 죄다 곱게 빻기 시작한다. 처음에 그린 그림은 굉장히 투박했는데 돌들을 곱게 빻아서 그림을 그려보니 굉장히 풍부한(?) 묘사가 가능했다. 이내 당신의 미술 실력은 점차 일취월장한다. 손으로 돌가루를 묻혀서 벽에 칠하는 것보다 동물 털을 이용하면 훨씬 더 세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곱게 빻은 가루를 대롱 안에 넣고 훅 불어서 넓은 면적에 색을 칠할 수 있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지난 달에는 손바닥 모양이나 단순한 기하학 무늬나 그리고 있었지만 어제는 초원을 누비는 가젤 무리를 하나하나 세세하기 그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 당신은 동굴 내에서 벽화 미술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알타미라(Altamira) 동굴 벽화의 일부. 후기 구석기 시대인 기원전 15,000~13,000년경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인류의 걸작이 현대 문명 사회에 알려지게 된 것은 20세기의 일이었는데, 처음에는 전문가들이 '이것은 조작이다!'라고 처음에 의심을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동굴 벽화가 원상태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곧이 곧대로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양한 연대 측정 결과 이 그림은 분명 구석기 시대에 그려진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을 바로 화학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선사 시대 조상들이 예술 활동을 벌였던 석회 동굴 안에서의 화학은 수십만년 전이나 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석회의 주성분인 탄산칼슘(CaCO3)은 동굴 내의 물, 그리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와 결합하여 물에 용해될 수 있는 탄산소수칼슘(Ca(HCO3)2)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비가역적(irrversible)인 화학반응이 아닌 가역적(revesible)인 반응이다. 즉 탄산칼슘은 어떤 조건에서는 물과 이산화탄소와 결합하여 탄산수소칼슘이 되지만 어떤 조건에서는 다시 물과 이산화탄소를 내놓으면서 탄산칼슘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화학자들은 이런 반응의 경우 화학 반응식에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화살표를 그려 넣음으로써 두 물질이 서로 왔다갔다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석회동굴 내부의 화학반응. 오른쪽으로 가는 반응은 석회의 침식을, 왼쪽으로 가는 반응은 석회의 침전을 의미하므로 전자는 석회동굴의 형성을, 후자는 종유석, 석순, 석주의 형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위 화학식은 벽화가 그려진 동굴 벽이 천년만년 변치 않고 그 상태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석회암이 화강암으로 변한다든지 하는 화학적 조성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석회 동굴 벽은 수만년이 지나도 탄산칼슘 성분의 석회 동굴 벽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다만 겉보기에는 늘 동일한 상태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분자수준에서 이 벽을 들여다보면 석회가 녹았다가 다시 굳는 화학 반응이 지속적으로 꾸준히,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와는 달리 끊임없이 일어나는 가역 반응 하에서 겉보기에서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우리는 동적 평형(equilibrium)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 동적 평형을 이루는 동굴 벽 위에 그린 그림에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석회 동굴 내부는 언제나 축축하므로 동굴 벽화 위로 습기가 끼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게 되면 동굴 벽화 표면 위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석회가 녹았다가 침전되는 반응이 반복된다. 결과적으로는 벽화 위에 석회층이 형성되어 벽면에 부착된 돌가루는 동굴 벽과 완전히 혼연일체가 된다. 즉, 돌가루가 동굴 내벽에 고착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석회 동굴이 무너지거나 혹은 급격한 부식으로 인해 동굴이 상당 부분 녹아나가지 않는 이상 벽화는 동굴 안에 언제나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만년 이상을 버텨온 동굴 벽화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이다.

구석기 시대의 예술 활동을 물감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선사 시대부터 인류가 안료를 현색제로 사용했음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 안료의 고착을 유도한 것은 동굴 내벽 그 자체이자 동적 평형을 통해 끊임 없이 형성되는 석회였다. 즉, 다시 말하자면 동굴 벽화 물감에서 전색제는 역할을 하는 것은 그림이 그려지는 벽 그 자체였으므로 구석기 시대에 사용된 물감에는 전색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인류가 동굴 밖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하며 문명 사회를 일구어나가기 시작하면서 동굴 벽화의 기법을 그대로 활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류가 세운 주거지 혹은 건물들의 벽은 자연적인 석회 동굴 내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건물 내벽에 인공적인 석회 동굴 벽을 만든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탄산칼슘으로 구성된 벽을 만들 수 있을까? 사람들은 산화칼슘(CaO)으로 구성된 생석회를 곱게 빻은 뒤 여기에 물을 부었다. 그러면 열이 발생하면서 녹말풀같이 점성을 가진 반죽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소석회로 화학적으로는 고농도의 수산화칼슘(Ca(OH)2) 수용액이 되겠다. 적당한 찰기를 가지는 소석회 반죽이 만들어지면 이것을 건물 벽에 바르고 장시간 건조시키는데, 이 때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수산화칼슘과 서서히 결합하면서 탄산칼슘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탄산칼슘 벽을 회벽(灰壁)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회벽칠은 『신약성서』에서도 등장할 정도로 고대 인류 사회에 널리 알려진 기술이었다.1

회벽이 제조되는 과정

사람들은 회벽이 완전히 굳을 때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 건조 과정 중에 안료를 소석회 반죽 표면 위에 바르면 반죽이 회벽으로 전환되는 과정 중에 점착된 안료가 회벽과 함께 굳어버리게 되고, 그 결과 안료가 회벽 표면에 영구히 고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회벽에 안료를 굳혀 그린 그림을 프레스코(fresco)라고 한다. 이탈리아어로 '신선한'이라는 뜻을 가진 프레스코가 이 그림 기법의 어원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소석회를 벽에 바른지 얼마 안 된 '신선한' 상태에서 안료를 발라 그림을 그려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프레스코는 중세 및 르네상스 시기 성당 내 벽화에서 굉장히 자주 볼 수 있는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가 제일 유명한 프레스코라고 할 수 있겠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otti, 1475-1564)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 프레스코 벽화. 정가운데 보이는 것이 바로 「아담의 창조」이다.

그런데 프레스코의 기법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그림을 그리려면 표면에 회칠을 해야 한다. 이것이 벽화라면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비교적 작은 크기의 양피지나 목판 위에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프레스코를 그리겠다고 언제나 표면 위에 회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프레스코화를 그리려면 소석회 반죽을 칠한 뒤 빠른 시간 내에 안료를 점착시켜야 했고 또 굳을 때까지는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그림 그리는 작업 중에 온갖 시공간적 제약이 가해졌다. 게다가 건조 과정이 내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 비가 오거나 흐리거나 혹은 날씨가 쨍쨍하게 맑고 덥거나 하면 회벽이 굳는 속도가 일정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림 전체의 연속성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이 일정 시간동안 그릴 수 있는 작업량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프레스코화는 먼저 일부 부분에 회칠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난 뒤 그곳 작업이 끝나면 옆 부분에 회칠을 하고 그림을 이어나가는 식으로 진행되어야 했는데, 이런 경우 회칠한 영역 사이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불연속성은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정리하자면 원하는 표면 위에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부분을 마음대로 그릴 수 없다는 것이 프레스코화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이러한 난점의 원인은 벽화에 사용되는 물감에 안료를 표면에 고착시켜 줄 수 있는 전색제 성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굴 벽화나 프레스코화나 안료의 표면 고착은 그림이 그려지는 표면에서 일어나는 화학이 담당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모든 그림은 벽 표면의 상태에 좌우되었고,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제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에 사람들은 안료가 회벽 뿐만이 아닌 다양한 표면에도 고착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안료를 평면 위에 잠착시킬 수 있는 뭔가를 섞으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전색제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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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색제의 발전

초기에 사람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전색제는 다름 아닌 달걀 노른자였다. 달걀 노른자만 뽑아 내서 안료와 함께 섞어주고 거기에 식초와 물 혹은 백포도주를 섞어주면 점성이 있는 물감이 만들어졌다. 달걀 노른자는 단백질 덩어리이고 식초와 공기 중 산소와 반응하면서 점점 변성되어 고체로 굳게 된다. 따라서 이렇게 달걀 노른자로 섞어 만든 물감을 표면 위에 발라주면 처음에는 끈적한 상태로 표면에 붙어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딱딱한 고체로 남아 표면 위에 고착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달걀 노른자를 전색제로 사용하여 그린 그림을 템페라(tempera)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어로 '섞다'는 의미의 temperare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템페라 덕분에 건물 벽이 아닌 양피지, 목판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고 그림의 규모가 프레스코 벽화처럼 거대하지 않아도 되었다.

르네상스 이전 서양 미술사는 곧 교회 미술사나 다름 없었다. 위에서 봤다시피 중세 시대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의 대부분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영광, 성모와 성인들의 일화를 소개하는 교회 내 벽화였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발명된 템페라는 무엇을 그리는 데 주로 활용되었을까? 템페라의 장점이 건물 벽이 아닌 표면에도 작은 크기로 그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바로 이콘(icon), 즉 성화(聖畵)를 그리는데 전통적으로 템페라화가 활용되었다.

템페라로 그려진 이콘들. 특별히 후광(halo) 등의 표현을 위해서는 보편적으로 금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에는 성화 말고도 다른 그림을 그리는데 널리 활용되었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비너스의 탄생」

그런데 프레스코와 템페라를 비교해보면 템페라화는 굉장히 평면적이고 단순한 인상을 준다. 동방 교회의 성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만화 그림만큼이나 굉장히 사실적이지 않게 평면적으로 그려진 것을 생각해보라.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바로 달걀 노른자를 섞은 템페라 물감이 칠해진 표면 위에 굉장히 빠르게 고착되어 버린다는 점에 있다. 빠르게 고착되어 굳어버리는 물감은 화가들의 표현력에 상당한 제한을 주는 요소였다. 그리고 또다른 문제는 다름아닌 달걀 노른자의 수급에 있었다. 현대와 같은 양계 시스템이 전무했던 중세 시대에 미술가들의 수요를 맞춰줄 수 있는 달걀 공급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가난하던 시절 달걀 반찬이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고 하는 대한민국의 수십년 전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수백년 전에 달걀 노른자를 따로 빼내서 물감으로 활용하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사치스러운 것이었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달걀 노른자와 같은 고착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좀 천천히 굳는, 그리고 보다 손쉽고 값싸게 얻을 수 있는 전색제를 개발하고자 애를 쓰게 되었다.

그런데 해결책은 굉장히 손쉽게 발견되었다. 이탈리아 화가들로부터 템페라화를 전수받은 플랑드르(Flandre) 지역의 화가들은 템페라 물감의 색상과 굳기를 조절하기 위해 식물성 기름중 하나인 아마인유(아마인유, linseed oil)를 물감에 조금씩 섞어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화가들이 대담하게 계란 노른자 없이 안료를 아마인유에만 풀어 그림을 그려보았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그 결과가 굉장히 좋았다는 것이었다. 아마인유가 시간이 지나면 고체로 굳게 되어 안료를 표면 위에 고착시켜줄 수 있는 전색제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사람들은 전색제가 기름이었으므로 이렇게 그린 그림을 유화(油畵, oil painting)이라고 물렀다. 당시 플랑드르 화가들은 유화가 템페라화에 비해 여러 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따라서 플랑드르 지역에서 발생한 유화는 여러 가지 우수성 덕분에 템페라화를 차츰 밀어내고 서양 미술의 대표 회화 방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어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초창기 유화의 세밀한 표현력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그림은 너무나도 유명한 다음 그림이다.

얀 판 아이크(Jan van Eick, 1390?-1441)의 「아르놀피니의 초상」

위 그림은 서양 미술사를 학습할 때 절대로 빠지지 않는 명작이다. 우리가 주목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등장 인물이 입은 옷의 주름 표현인데 당시 프레스코나 템페라로는 이런 세밀한 표현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초창기 유화의 걸작으로 다음 그림을 빼놓을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모나리자(Mona Lisa)」

전색제로 기름을 사용한 유화는 미술 활동 방식 및 미술 시장에 혁신을 몰고 왔다. 템페라의 경우 물감이 단시간 내에 굳어버리기 때문에 물감을 만들고 나서 그 즉시 그림을 그려야 했다. 즉 화가가 그림을 그리겠다고 생각을 하면 처음 해야 할 일은 물감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 작품에 쓰이는 물감이 한두개가 아닌데 그림을 그릴 때마다 수시로 물감을 즉시 만들어서 사용한다는 것은 굉장히 벅찬 일이 아니겠는가? 유화 물감은 이런 문제가 단 한방에 해소될 수 있었다. 기름이 달걀 노른자보다 훨씬 느리게 굳었기 때문에, 기름에 분산시킨 물감이 잘 밀봉되어 있기만 한다면 품질이 유지된 채 장기간 보관이 가능했다. 따라서 화가들은 더 이상 물감을 만드느라 애쓸 필요가 없어지면서 그림 그리는 데 드는 수고가 훨씬 경감되었고, 이제 물감을 만드는 일은 화가들의 가내 수공업이 아닌 물감 전문가들의 산업이 되었다. 물감을 개발하는 사람, 물감을 제조하는 사람, 물감을 포장하는 사람, 물감을 유통하는 사람이 생겨난 것이다.2 이러한 산업 구조의 변화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면서 대량의 다양한 물감이 값싸게 유럽 전역에 제공될 수 있었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멋진 물감들이 속속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유럽의 서양 미술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탄탄하게 마련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유화가 물감 역사의 끝은 아니었다. 유화가 아무리 비교적 구하기 쉬운 재료를 전색제로 활용했다고 하더라도 아마인유가 물보다는 흔하지 않을 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세상에 흔하디 흔한 물을 전색제로 활용할 수 없을까 늘 고심해 왔다. 문제는 안료가 물에 절대로 잘 안 풀리더라는 것이었다. 화학적으로 생각해보면 물은 유전 상수가 굉장히 높은 극성 용매이기 때문에 물과 상호작용을 할 일이 전혀 없는 안료들이 물에 고르게 분산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애초에 무리였다. 게다가 물은 달걀 노른자와 기름과는 달리 끈적이지 않는다. 점성이 없다는 것은 분자간의 상호작용이 굉장히 빠른 시간 내에 정리가 된다는 것인데 맹렬한 속도로 안료를 물에 풀어놓는다고 하더라도 단시간 내에 안료가 바로 침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난점을 극복하고 수채화 물감의 개발을 가능하게 해 준 물질이 바로 아라비아 고무(gum arabic)였다. 아라비아 고무의 화학 구조는 녹말의 그것과 굉장히 흡사한 글리코사이드 결합의 연속인 탄수화물인데, 화학 구조상 수산화기(hydroxy group)가 굉장히 많이 있으므로 아라비아 고무는 물에 잘 녹아 투명한 액체를 만든다. 이 때 물 분자사이의 인력은 아라비아 고무의 용해로 인해 다소 감소하게 된다. 그런데다가 아라비아 고무는 분자량이 높으므로 물에 일정량 이상 녹이게 되면 굉장히 끈적한 점성의 액체를 만들게 된다. 이런 이유로 아라비아 고무가 물에 녹은 뒤에야 비로소 안료가 분산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수채화 물감이다.3

스티브 행크스(Steve Hanks)의 수채화

그런데 수채 물감은 굉장히 독특한 점이 하나 있다. 전색제가 표면 위에 남아 현색제를 고착시키는 용도로 사용되는 템페라화, 유화와는 달리 수채화의 전색제인 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증발해 버린다. 즉, 전색제로 사용한 용매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한 뒤 소멸(?)해 버리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아라비아 고무와 안료가 함께 굳어 종이 위에 고착되는데, 이 경우 아라비아 고무야말로 전색제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상온에서 고체인 아라비아 고무에 안료를 분산시킬 수는 없으며, 수채화 물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조건 물이 일정량 포함되어야만 한다. 물론 화학적으로는 이렇게 사용되는 물을 희석제(diluent)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어쨌든 붓에 묻혀 종이에 찍어바르는 것은 액체 아니겠는가. 그래서 회화의 관점에서는 어디까지나 물이 전색제이고 아라비아 고무는 안료와 물의 혼합 및 안료의 고착을 돕는 물질로 취급되는데 회화 세계에서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아라비아 고무를 접합체(接合劑, binder)라고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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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릴 물감의 탄생

기왕 수채화 물감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크릴 물감까지 짚고 다음 편으로 넘어가자. 수채화가 물감이 굉장히 혁신적인 물감임에는 틀림없으나 유화와는 달리 '수채화는 학교에서 미술 시간에나 그리는 그림' 취급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수채화 물감 재료의 특징으로 인한 수채화의 단점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단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접합체로 사용된 아라비아 고무를 보다 효과적인 재료로 교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연 재료 중에서 아라비아 고무에 필적할 만한 우수한 안료 분산 성질을 가진 접합제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 천연 재료 중에서 없으면 인공 재료로 합성해 내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라비아 고무와 같이 공유 결합(covalent bond)으로 길게 연결된 고분자(polymer)에 대한 화학자들의 이해는 전무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단량체(單量體)라고 불리는 간단한 분자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긴 중합체(重合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독일의 화학자 헤르만 슈타우딩거(Hermann Staudinger)가 최초로 보고했을 때 대부분의 유기화학자들은 '당신이 정제(purification)를 제대로 못해서 끈적이는 혼합물을 제대로 분리하지 못했을 따름이오.'라고 비아냥거렸을 뿐, 그러한 방식으로 높은 분자량의 거대분자가 제조될 수 있다는 생각을 애초에 하지조차 못했다.

그렇기에 수채 물감에 포함된 천연 고분자인 아라비아 검을 개선한 새로운 합성 고분자 접합체 기반의 물감이 발명되기까지는 수백년을 기다려야 했다. 고분자 합성에 대한 지식이 급속도로 축적되기 시작한 20세기 초반, 독일의 화학자인 오토 룀(Otto Röt;hm)이 마침내 물에 녹을 수 있는 고분자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이름하여 폴리아크릴산(poly(acrylic acid), 줄여서 PAA). 폴리아크릴산은 아크릴산(acrylic acid)에 포함된 아크릴산기(acrylate)사이의 중합을 기반으로 합성된다. 이렇게 제조된 폴리아크릴산을 접합체로 사용하는 수채 물감을 아크릴 물감(acrylic paint)이라고 한다. 그런데 폴리아크릴산은 아라비아 고무의 역할을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위와 같은 장점을 십분 활용한 것이 바로 네일 아트이다. 네일 아트에서 요구하는 특징들이 모조리 잘 들어맞는 물감 재료는 아크릴화가 유일하다. 만일 유화로 네일 아트를 했다고 생각해보라. 네일 샵 선생님이 '오늘 물감 발랐으니까 일주일 동안 손톱에 뭐 닿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세요.'라고 얘기할 것이며 '아참. 손톱 위에서 물감은 갈라져서 곧 탈락할 거에요.'라고 덧붙일 것이다. (관련 내용은 3편에서 자세하게 언급할 것이다.)

네일 아트

아크릴화는 기본적으로 유화와 느낌이 비슷하지만 기름 특유의 광택이 덜한 반면 수채화와 같은 맑은 느낌의 농담 조절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자넷 추팩(Jeanette Chupack)의 아크릴화

자, 이번 편을 통해 전색제의 역할이 무엇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전색제가 발전해 오면서 서양 미술의 발전을 이끌어왔는지 개략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미술에서 사용되는 전색제의 종류는 무궁무진하게 많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고 하나에 집중하여 좀 더 깊게 설명을 진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서양 미술의 대표인 유화가 되겠다. 다음 편에서는 유화의 전색제인 아마인유가 과연 어떤 재료이고 또 어떠한 방식으로 유화가 그려질 수 있는지 화학적으로 이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다음 편으로 넘어가기 전에 본 홈페이지의 글 "소이캔들이 건강에 좋다고?"를 먼저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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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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