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지하의 포스코 체력단련실에서 운동을 시작한지 벌써 2년하고도 몇 개월이 지났다. 매일같이 운동한 것도 아니고, 식이요법을 병행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기본적인 바탕도 수준 이하인데다가 내 운동 습관 ㅡ 가벼운 것을 자주 들려고만 할 뿐 도전적인 시도는 하지 않는 ㅡ 으로 인해 운동의 효과는 매우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정말 매우 서서히. 그나마 대학원 들어와서 몇몇 선배들의 효과적인 (혹은 가혹한) 지도 하에서 '어라, 예전과는 좀 다른데?'라고 느끼게 되었다. 대표적인 현상이 체중의 증가로, 현재 나는 60.0kg를 유지하고 있다.
운동을 하다 보면 별의 별 사람을 다 보게 된다. 나와 같이 매우 마른 사람(속칭 캐멸치)을 비롯하여 다이어트가 시급한 사람들, 저 사람은 원래 트레이너가 아닐까 의심하게 하는 건장하고 단단한 몸을 가진 우월한 능력자들이 있다. 대체적으로 몸이 좋은 사람들의 체중은 매우 마른 사람들과 매우 뚱뚱한 사람들의 중간 정도이다. 예를 들어 신장이 175cm(=나)인 경우, 적절한 근육량과 체지방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67kg~70kg 정도 되면 건장하게 느껴지는 ㅡ 그리고 운동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실제로 그런 ㅡ 법이다. 나는 그보다 한참 아래인 것이고, 어떤 이들은 그보다 한참 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모자르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는 중용의 상태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은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런 것이 탁월성(덕)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탁월성은 중간적인 것을 겨냥하는 일종의 중용이다.'
이것은 체력단련이라는 대상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본다. 나같은 경우는 '모자람의 악덕'이고, 너무 통통하신 분들은 '지나침의 악덕'을 소유하신 분들이다. 이른바 몸짱들이 바로 이 분야에서 탁월성을 가진 몸 좋은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몸 좋음'의 몸은 전체적인 형태를 두고 논하는 것이라야한다. 아무리 평균이 똑같은 50점이라고 해도 50, 50, 50, 50을 맞은 사람과 0, 100, 0, 100을 맞은 사람은 중용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경우에 해당한다. 한 쪽은 진실된 중간적인 것을 추구한 사람이고, 다른 한 쪽은 극단적인 모자람과 지나침을 추구하여 겉으로만 중간적인 것을 추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로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분수의 몸을 가진 자들이다.
요사이 몸짱 열풍은 다분히 상체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수 비가 탄탄한 복근을 무대위에서 (식상할 정도로) 늘 까보이고, 가수 택연이 '캐비캐비'를 외치며 잘 발달된 가슴을 선보이고, 가수 김종국이 등과 허리가 중요하다며 다소 우람한 뒷태를 부담스럽게 보여주는 것을 우리는 자주 봤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잘 발달된 허벅지와 장딴지를 보여준 연예인은 없었다. 쇼트트랙 김동성의 허벅지가 내 허리(~28인치) 정도가 되어서 다들 놀라워하곤 했으나 정작 사람들은 김동성의 상반신 누드 사진 이 공개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음탕한)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요즘 잘 발달된 복근을 공개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지만 그들은 스키니진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연예인들의 상투적인 옷 벗기 및 몸 공개 이벤트가 영향을 끼친 탓인지, 남성들의 이상적인 몸의 모습은 '상체는 우람하되 하체는 늘씬한' 형태가 되고 말았다.
이런 몸은 보기 좋다. 나쁘다는 게 절대 아니다. 헬스 트레이너들은 이런 몸을 '보여주기 위한 몸으로 진정한 아름다운 몸과는 거리가 멀다' 혹은 '하체가 얼마나 중요한데...' 라면서 폄하하기 일쑤이지만 어쨌든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ㅡ 어라, 부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ㅡ 이런 몸들은 어느새 '좋은 몸'으로 인식되어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굳이 적용시키면서까지 양보하자면 가분수도 적당한 값이면 OK라는 것이다. 문제는 과도한 가분수, 즉 '상체는 과도하게 우람하고 하체는 그에 너무 못미치는' 형태라는 것이다. 뭐든지 균형이 있기 마련인데, 가끔 이런 분들을 보면 정말 경악스럽기 그지 없다. 상체는 진짜 당장 지구를 들고 있는 아틀라스에게서 '당신 좀 도와주겠소'라고 제안할 정도인데 하체를 보면 아틀라스가 '됐네요 이 사람아'라고 할만한 그런 사람들.
사실 가분수도 가분수 나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분모가 과도하게 작은 경우, 다른 하나는 분자가 과도하게 큰 경우이다. 두 경우 모두 바라보는 이의 눈을 찜찜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 충격적이고 더 소름 돋게 만드는 것은, 이 가분수의 몸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몸은 정말 좋다고 생각하는 것같다고 ㅡ 사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직접적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ㅡ 생각이 스멀스멀 들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건 정말 이유 모를 기분나쁨의 원천이요, 사실 질투이고 우월감과 열등감의 기묘한 일체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학창시절에 한 주먹 좀 했어'라고 으스대는 한 급우의 떠벌임에 분개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중학생이더 이상 아니지 않은가. 좀더 철학적으로 접근해서, 만일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성 논의를 받아들인다면 이런 것은 좀 지양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분수 몸을 볼 때마다 화들짝 놀라게 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뭐 물론 내가 남들 몸을 평가할 만한 수준의 인물은 전혀 아니지만 그래도 남의 몸을 보고 뭔가를 느낄 수는 있지 않은가. 이건 순전히 몸을 보고 느낀 문제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 접근으로 얻은 내 결론이다 (그래서 요즘 스키니진에 딱 붙는 다리보다 보통 바지에 딱 붙는 다리가 더 멋지다고 생각을 그렇게 바꾸게 되었다). 게다가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GQ에서도 이런 글을 올렸다 ㅡ "물론 거울을 들여다볼 때 근육을 발견하는 재미는 덜하다. 하지만 다리의 근육이 더 단단해질수록, 진짜 강한 게 뭔지 깨닫게 된다." 그래, 가분수 당신, 뭔가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결코 가분수가 되지는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가 '가분수라도 되면 어디야.'라는 생각이 쓱 들면서 이 글을 싹 지워버리고 싶어졌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