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노파심에 먼저 이야기하자면 이 글은 섹스 경험과는 전혀 무관한 글이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도록. (난 개인적으로 이 글의 조회수가 가장 빠른 시일 내에 30을 돌파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처음으로 섹스라는 말을 입에 올렸던 것이 아마 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나는 옆 동의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집에서 출발해서 피아노 학원까지 걸어가는 데 당시 나의 걸음걸이로 20분 정도 걸렸다. 지금은 안양과학대학 부속건물이 세워져 있는 그 위치는 고물을 적치해두는 허름한 곳으로 철제 판으로 엉성하게 둘러져 있던 곳이었다. 요즘엔 좀 덜해졌지만 예전에는 그런 벽이 항상 스프레이 낙서로 도배되곤 했다. 하루는 그 벽이 교체되어서 그나마 말끔한 벽이 되었는데 며칠이 안 지나 새로운 스프레이 낙서가 등장했다. 그런데 하필 거기에 쓰여있던 낙서가 바로 sex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집에서 밥을 먹다가 어머니에게 '요즘 낙서하는 사람들 바보라고, 6이 영어로 에스, 아이, 엑스 ㅡ 식스잖아, 어떻게 '식스(six)'를 '섹스(sex)'라고 낙서해 둘 수 있을까?' 그러다가 '엄마, 혹시 섹스라는 단어가 있어? 무슨 뜻이야?'하고 여쭤보았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어머니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별로 대화가 완결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었다는 생각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내가 그런 말을 두 번이나 더 했던 것 같은데. 왜 그 때는 영어 사전을 찾아볼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내가 가지고 있었던 영어 사전이 어린이용 학습 사전이라 해도 sex 정도는 기본 표제어 ㅡ 빨갛고 굻은 활자로 옆에 별까지 달린 필수 학습어 정도는 아니어도 ㅡ 로 사전에 올라와 있었을 텐데. 나는 정말 진짜로 그 때 six를 잘못 써서 sex라고 누가 쓴 거라고 굳게 믿어왔다.

그러다가 섹스라는 단어가 실제로 널리 통용되는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3년 뒤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만큼이나 성적 호기심이 동년배 학생들 사이에서 은근히 폭발적으로 퍼진 적이 없었는데 정말이지 5학년에 진학하고 나서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이야기들을 정말 대량으로 전해 듣기 시작했다. 그러한 내용이 선생님이나 성교육 자료를 통해서도 점점 수입(?)되기 시작했지만 친구들을 통해 비밀리에 밀반입(?)되는 양이 더 많긴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나이의 꼬마들이 알면 뭘 안다고 그런 이야기들로 한창 꽃을 피웠는지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충격적이고도 신기한 것이었던지 반지를 끼운다든지 농구공을 골대에 넣는다든지 뭐 그런 이야기만 나와도 '에헤~' 거리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 경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성적 지식의 축적은 남들과는 약간 달랐던 것 같다. 이미 그 즈음부터 도색 잡지나 포르노 비디오 등을 보며 '몸의 변화'를 느낀 애들도 많았겠지만 ㅡ 물론 몸의 변화 뿐 아니라 나이에 걸맞지 않은 일련의 행동 양식(?)까지도 ㅡ 내 경우 대부분의 성적 지식은 사전을 통해 축적되었다. 사전도 그냥 사전이 아니다. 국어 사전, 영어 사전, 그리고 컴퓨터 백과 사전이 그런 선생님 노릇을 톡톡히 해 주었다. 정말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희한하기도 하고, 어쩌면 감사하기도 하다. 뭐, 왜곡된 성 관념이 적어도 개입할 여지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sex라는 단어는 한국어로는 성(性)인 것이고,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냥 섹스라고 말한다. 그렇게 국어 사전에서는 '성'이라는 표제어부터, 영어 사전에서는 'sex'라는 표제어부터 일종의 검색(?)을 시작한 것이다. 그냥 사전을 쓰지도 않았다. 당시 우리 집에 있었던 '자칭 타칭 국보'인 양주동 선생이 쓴 국어 대사전이랑 아버지와 내가 공용으로 쓰던 큰 영어 사전이었다. 온갖 단어들이 쏟아져나왔다. 뭐 이렇게 관련된 단어가 많을까 싶을 정도로 무지하게 많았다. 굳이 이야기하려니 약간 쑥스럽기는 하지만, 초등학교 때 사전을 정말 많이 보았지만 이 때만큼 집중적으로 일련의 단어들을 학습(?)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가끔 성격, 성질, sextillion, sextet과 같은 단어가 등장해서 학습을 방해하긴 했지만, 아무튼 지식의 축적은 무서운 속도였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미스테리이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때에는 성에 관한 기초적 지식을 알려주는 기사들이 내 주변에 들끓기 시작했다. 즐겨보던 '과학동아'에서도 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아버지께서 정기구독하셔서 탐독하던 '시사저널'에서도 어른들에게는 별 새로울 것 없는, 그래서 마치 나 보라고 기자님이 써 놓은 것 같은 특집기사 내지는 취재기사가 몇 주째 늘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백과 사전의 능력이 빛을 발했는데, 이를 테면 '오르가즘(orgasm)'같은 단어는 무슨 뜻인지 정말 자세하게 나와 있었고, 자위라는 말이나 수음이라는 말이나 다 같은 말이며 영어로는 masturbation으로 손을 더럽게 한다는 라틴어 어원이 있으며 순우리말로는 용두질이라고 한다는 등 점점 그 당시 초등학생 아이 치고는 꽤나 전문적인 텍스트를 파고들기 시작한 것 같다. (그렇다고 백과 사전을 단순히 성교육용으로 사용했다고 오해하지는 말기를!!)

하루는 사전을 찾아보는 데 'look up to sex'라는 숙어가 있었다. 뜻은 '섹스에 눈을 뜨다'였다. 나는 저녁을 먹고 나서 9시 뉴스를 보면서 과일을 먹고 계시던 아버지에게 다가가 슬쩍 나지막하게 여쭤보았다.

'아빠, 아빠는 언제 look up to sex 했어?'

'어? 뭐라고?'

'아... 그러니까 언제 성에 눈을 떴어?''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본인은 중학교 2학년 때쯤이라고 하셨다. 그 때 내가 느꼈던 걱정과 우려란. 나는 무려 아버지보다 3년이나 일찍 이런 이야기를 들어버린 것이었다. 더 충격적인 건 아버지께서 덧붙여서 하시는 말씀이 아직 성수는 그런 거에 대해 알기에는 좀 이르다고 했던가 그랬다. 어이쿠. 그러나 이를 어째, 이미 나는 알아 버렸네.

섹스에 대해서 알게 된 이후로 성경을 볼 때에도 가끔 민망할 때가 있었다. 예전에는 동침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몰랐다. 동침이 대체 뭐지? 이것은 마치 어렸을 때 '엄마, 아기는 어떻게 낳게 되는 거야?'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런데 야곱이 두 아내 레아와 라헬 사이에 번갈아가며 동침하며 아이를 12명을 낳았는데, 아이를 낳게 한다는 동침이 바로 그 섹스라니 뭔가 읽는데 기분이 묘해지더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것이 성경에 다 쓰여 있어?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것 중의 하나는 '사무엘하'에 나오는 일이었는데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킨 뒤 자기 아버지 다윗의 열 후궁들과 성 위 천막에서 공개적으로 동침하는 사건이었다. 세상에, 그 동침이 그 동침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이런 내용도 쓰여있다니 정말 충격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알게 되니 그제서야 이해가 가는 내용들도 많이 있었다.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되고나서 다윗이 성에 돌아와 한 일들 중 하나가 바로 아들과 동침한 열 후궁들을 가두고 평생동안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동침이 그 동침이니까 다윗이 후궁들을 냉대했던 것이다. 뭐 어차피 성경은 성경(聖經)이지 성경(性經)이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인간의 삶에서 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겠지. (물론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런 내용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중학교 진학 이후에는 말 그대로 성에 눈만 뜨는 게 아니긴 했다. 구성애 아주머니가 sex는 성행위가 아니라 성을 의미하는 단어라지만, 아무래도 애들은 전자의 뜻에 더 열광하기 때문이다. 뭐 그 때부터는 컴퓨터의 발전으로 인해 각종 사진 자료로 광대한 학습을 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또한 대한민국 인터넷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하는 O양 비디오 사건이 터지면서 움직이는 사진(?)에 몰두하는 친구들 또한 늘어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성에 대해서 알아 가기 시작하는 때는 우리들의 경우 대개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였던 듯 싶다. 확실히 아버지 세대보다는 빨랐으며, 아버지 세대보다는 다양하고 실감나는(?) 매체가 판을 치고 있었고, 그리고 아버지 세대보다는 접근성이 더 쉬워졌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아버지 세대는 친구들끼리 몰래 모여 산으로 가져가 훔쳐 보는 '비키니 입은 여성의 사진'만으로도 충분했다고 하는데, 적어도 우리 세대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요즘은 성을 접하는 시기가 훨씬 더 앞당겨져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 중에서도 look up to sex하는 경우가 예전에 비해 늘었다고 한다. 이미 고학년 중에는 모방 심리가 작용하여 어른들과 같은 연애를 따라한다든지 하는데 정도가 지나치는 상황도 왕왕 발생한다고 한다. (물론 우리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겠지만 단언컨대 이런 류의 것들은 해가 갈수록 증가한다!) 그 어린 나이에 도대체 무엇을 알면 얼마나 알까 끔찍스럽기도 하지만 어째 신기하지는 않다. 요즘 범람하는 각종 음란물과 인터넷과 TV에서 자주 접하는 15세 이상의 행동들을 '늦게 까지 안 자고 노는' 초등학생들이 자주 접하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다. 오히려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이들이 접하는 성에 관련된 것들이 극히 '왜곡된 성관념을 심어주는 포르노물' 수준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잘 못 가르치는 선생보다 더 위험한 선생은 바로 잘못 가르치는 선생이다. 마찬가지이다. 사실 섹스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어린이들에게 낫겠지만, 상황이 이럴진대 덮어두고 모르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왜곡된 성에 노출되는 것을 쉬쉬하기보다는 올바른 성을 어린이들에게 일깨워주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 사실 어린이들이 섹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세상 무너질 일, 대성통곡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든지 제대로 알고 적절한 통제 하에서 바른 목적을 위해 하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어른들이 걱정하는 무분별한 아이들의 성경험이나 성 관련 범죄 따위의 호들갑은 사실 어른들 스스로가 자행한 것이므로 '자업자득'이다. 아무렴. '전혀 면식도 없는 여성이나 남성을 길거리에서 마주치자 황홀경에 빠져 아무도 보지 않는 뒷골목에서 섹스를 즐겼다'와 같은 전혀 설득력 없고 말도 안되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내용을 나름 스토리와 플롯이랍시고 억지로 짜맞추어 영상을 찍어 대량 배포되는 이 세상에, 분별력 없는 젊은 사람들이 어디 그런 판타지에 젖다 보면 전국민을 경악시킬 기괴한 성범죄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있나. 예전에 한스밴드가 2집 컴백곡 '호기심' 중에서 '어른들은 나를 몰라 내가 어린 줄만 알아 옛날같으면 벌써 시집갈 나인데'라는 가사를 불렀을 때 느꼈던 것은 그 옛날 조선의 어린 신랑신부들이 아무 것도 모른 채 결혼 생활을 시작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도색 잡지나 포르노 영상이 없었지 않은가. 우리네 어린 총각처녀들은 성인 산업의 빛나는 결과물들 사이에서 헤엄치고 있으니 이게 문제인 것이다.

뭐, 그렇다고 내가 잘났다는 글은 아니다. 단지 나는 내가 섹스에 대해서 알아 차리게 된 짧은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뭔가 추억할 만한 재미있는 것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지 나는 좀 남들과 달리 위대했다 뭐 그런 건 아니다. 그러니 여태 섹스를 해 보지도 않은 내게 '그런 어린 날의 사전 공부가 무슨 소용이냐, 이 헛똑똑이 천연기념물아'라고 누군가가 비난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렇다고 잘못한 건 없지 않은가 :) 아무튼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처음 포르노를 접하는 시기도 앞당겨지고 있고, 이성과 첫경험을 하는 시기도 앞당겨지고 있고. 그런데 모든 것이 다 앞당겨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역행하는 물살을 타고 점차 시기가 늦춰지는 건 결혼과 육아의 시기 뿐인 것 같다. 참 이상하네. 생산을 위한 섹스의 장소를 마련해 주는 것이 결혼이고 그것의 결과물이 육아인 것인데, 정작 섹스에는 일찍 눈을 뜨면서 결혼과 육아는 늦어진다. 결국 사람들이 눈을 뜬 섹스는 결코 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인간적인 즐거움을 위해서인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섹스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 좀 씁쓸하긴 하다. 난 좀 보수적으로 생각하니까 혼전순결은 당연하다고 그냥 믿고 사는 사람이잖아? 어쨌든 방망이를 함부로 놀리는 건 경계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 덧붙여서: 공개되는 게시판에 '섹스'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니 기분이 참 이상하기는 한데, 뭐 이상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보니 또 이상하지도 않고. 아무튼 이런 글을 올려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게 또 신기하기도 한데, 뭐 신기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보니 또 신기하지도 않고.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