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를 그려놓고 그림의 제목이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하지만 언뜻 생각해보면 내가 보고 있는 사물이 파이프라는 것을 아는 것은 내가 이전에 경험했던 것을 떠올림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은 선험이 없다면 이것은 정말 파이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저 그림은 이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르네 마그리트 전시회에서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회귀', '미소', '심금', '위대한 유산' 등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작품들과 그가 찍은 정말 몇 분짜리 무성영화들을 감상해 볼 수 있었다.

사람이 무척 많았다. 줄 서서 미술관 관람표를 끊어야 했던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서울시립미술관에 들어서자 2,3층에 가득히 돌아다니는 사람은 그의 그림 golconda를 연상케 했다. 정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무슨 구경을 주말 한창 때 국립중앙박물관 구경하듯(?) 했다. 솔직히 토요일 오후면 사람이 가장 많을 때니까 어쩔 수 없다 쳐도 우리나라에 르네 마그리트가 이리도 유명했는지, 언제부터 사람들이 초현실주의를 음미하기 위해 이곳까지 다들 행차하셨는지 기이할 노릇이다.

사실 초현실주의는 언제나 낯설고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의 단편영화와 그림을 봤을 때 나는 왠지 에스파냐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가 떠올랐다. 초현실주의가 과연 현실을 뛰어넘는 초(超)라서 초현실인지 멀쩡한 현실을 초를 쳐서 초현실인지 참 모호하지만 아무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과거에는 정말 초현실주의 작품을 보고 나름 경탄하고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실을 전복시키려는 시도가 정치와 경제와 예술과 문학, 철학과 종교에서도 파다하게 벌어지는 오늘날 이 대한민국 속에서 20세기 초중반의 유럽의 초현실주의 그림들은 이젠 파격이라기에는 조금 귀엽게 봐 줄 만한 그냥저냥 그런 그림들이다.

아울러 초현실주의의 그 기묘한 사물배치와 뜬금없는 상황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IQ 테스트나 창의력 경시대회 자리에 오게 만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아까 말한 'Ceci c'est pas une pipe'같은 건 정말 그림이 우리에게 '왜일까?'하고 능글맞은 모습으로 물어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별다르게 화려하거나 멋지지도 않은 초현실주의 그림이 우리를 농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괜히 정말 재수가 없어진다. 큐비즘과 포비즘에서부터 다다이즘까지가 사실 대부분이 그렇다. 모두 한 덩어리로 '이상했던 그림들'이라고 포장시켜 그냥 걔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그렸대, 라고 하고 지나가기 일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고집'같이 교과서에 수도 없이 나온 작품들이라면 몰라도 일반적인 초현실주의의 작품들은 별도의 해설자나 책이 없으면 도무지 이게 뭔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래, 감이 오지 않으니 지금 예술의 길을 걷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면 좀 위안이 될라나? 그래도 음악의 경우라면 난 초현실주의적인 음악을 '감내'할 수 있고 솔직히 즐기라면 '달에 취한 삐에로'처럼 소음과 괴성같아도 활짝 열린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다. 수용하는 기관이 눈이냐 귀냐에 따라 이렇게 마음가짐이 달라지다니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사실 오늘도 바보가 되어 온 느낌이다. 르네 마그리트 전시회를 통해 무슨 영감을 받았거나 전율을 느꼈다면 난 지금쯤 여기서 초현실주의 예찬론을 쓰고 있겠지. 그의 그림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혹은 내 삶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는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사실 르네 마그리트라는 초현실주의 화가의 전시회에 다녀왔다는 것을 증명할 티켓을 하나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글쎄, 그건 내가 이제는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예술적 감각이 이미 내 안에서 소멸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냥 르네 마그리트는 그렇게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그렸대. 나도 초현실주의에 관해서는 'Monsieur Magritte, c'est une pipe(마그리트 씨, 이건 파이프인데요.)' 라고 말하는 똑같은 범인(凡人) 중 하나인 셈이다.





For the sake! Of the call!

-fluo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