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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회 대분열 9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9
포티오스 분열
Photian Schism
이번 편의 주인공인 포티오스 1세(Φώτιος Α', 858-867, 877-886)는 비잔티움 제국의 상류 계급 가문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820년부터 제국을 다스린 아모리오(Αμόριο) 황조(皇朝)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집안이었다. 제7차 세계 공의회를 이끌었던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 타라시오스(Ταράσιος, 784-806)는 포티오스의 아버지 세르요스(Σέργιος)와 매우 절친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포티오스는 타라시오스를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이 생각했던 듯 하다. 이 정도면 포티오스의 가문은 정치종교적으로 제국의 집권 세력과 매우 밀접했던 집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성상공경론자였다는 이유로 9세기 초부터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했고, 이러한 상황은 황태후 테오도라(Θεοδώρα)가 정권을 잡을 때에야 비로소 해소되었다.
포티오스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당시 학생들이 받을 수 있었던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많은 것을 쏟아부었던 포티오스의 탁월한 능력과 학자적 식견은 이내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았고 황궁에까지 그의 이름이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적수였던 사람들조차 그의 놀라운 실력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는 문법과 시문학, 수사학, 철학, 의학, 법학, 그리고 자연과학에 능통했다고 니키타스(Νικήτας)1는 기록하고 있다. 테오도라 정권을 이끌었던 유능한 관리인 테옥티스토스(Θεόκτιστος)는 포티오스가 당시 혼란스러웠던 제국을 정리하고 개혁정책을 펴는 일에 적임인 유능한 인재라는 사실을 간파했고, 곧 그를 궁정에 불러들여 최고위 행정관료직인 프로타시크리티스(πρωτασηκρητις)에 임명했다. 포티오스의 행정가적 기질은 여기서 빛을 발하게 되었고 그는 점차 궁정의 핵심 관료가 되어 어린 황제와 그의 섭정을 보필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는 성상파괴논쟁으로 혼란스러웠던 9세기 초엽과는 달리 유능한 인재들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활약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9세기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였던 니키포로스 1세(Νικηφόρος Α': 806-815), 요안니스 7세(Ιωάννης Ζ': 837-843), 메토디오스 1세(Μεθόδιος Α': 843-847)는 모두 제국 내에서 저명한 철학자이자 학자였으며 요안니스 7세의 사촌이었던 레온(Λεών)은 비록 843년 테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의 수도대주교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훗날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대학 총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는데 헌신하였다. 성상파괴논쟁이 종식되면서 제국을 이끄는 사람들은 안정된 내부 상황 속에서 제국의 안녕을 기원했고 철학과 과학 발전을 이끌면서 훗날의 마케도니아 르네상스(Macedonian Renaissance)라 불리는 비잔티움 제국의 중흥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보적인 세속적 분위기는 메토디오스 1세가 843년 성상파괴논쟁의 종지부를 찍은 뒤 4년만에 선종하게 되면서 바뀌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황제 미하일 1세의 아들이자 완고하기로 소문난 스투디우 수도원(Μονή Στουδίου)의 수도사였던 이그나티오스(Ιγνάτιος: 847-858, 867-877)가 세계총대주교좌에 오르게 된다. 테오도라 태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하지만 아마도 메토디오스 살아있었을 당시 높이 평가해 마지 않았던 이그나티오스의 성품과 신앙도 한 몫 했을 것이다.이그나티오스는 스투디우 수도회 출신답게 매우 보수적인 신앙을 견지했으며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분위기였던 세속적 화합과 중용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보였다. 또한 당시 정부와 교회가 세속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던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제국의 교회가 과거 전통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희망하였고 강하게 성상공경론을 옹호했다. 이러한 이그나티오스의 태도는 그동안의 성상파괴론 논쟁을 덮고 화해하려는 많은 온건파 주교들과의 마찰을 불러일으켰는데, 시라쿠사이(Συρακούσαι)4의 대주교였던 그리고리오스(Γρηγόριος)가 이그나티오스와 대립하다가 로마 교황에게 탄원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리오스는 결국 이그나티오스에 의해 폐위되어 대주교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테옥티스토스가 태후 테오도라의 형제인 바르다스(Bάρδας)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테옥티스토스와 바르다스는 원래 궁정에서 황태후 테오도라와 함께 어린 미하일 3세(Μιχαήλ Γ')를 보필하며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초반에는 보다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제국의 일신에 큰 공헌을 한 테옥티스토스의 힘이 우세했다. 이에 바르다스는 황실의 외척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에서 뒤쳐지는 것을 참지 못했건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바르다스는 테옥티스토스의 정책에 반대하는 온건파의 세력을 규합하여 테옥티스토스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 사건은 보수적인 신앙의 상징인 이그나티오스를 강하게 자극하였다. 그는 858년 주현절6 전례 때 모든 고관대작들이 보는 앞에서 바르다스에 성체 분배를 거절했는데, 그가 며느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웠다. 공적인 자리에서 망신을 당한 바르다스는 이를 갈며 이그나티오스를 몰아낼 구실을 찾았는데, 결국 음모를 꾸며 총대주교를 대역죄로 몰아 퇴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자리를 누구에게 임명하느냐가 문제였다. 바르다스는 자신이 추구하는 온건적인 정책을 보좌하고 교회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인물을 물색하였고 포티오스가 그 적임자임을 눈치챘다. 결국 그는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였던 포티오스를 콘스탄티누폴리스 세계총대주교로 삼았다. 처음에 포티오스는 바르다스가 자신을 총대주교로 임명한 것에 노를 발했으나 결국 뜻을 굽히고 총대주교좌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그는 총대주교가 되기 위한 부보제품, 보제품, 사제품, 주교품 등을 6일만에 초고속으로 받았고,7 총대주교가 된 포티오스는 동방의 다른 총대주교들과 로마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이 이그나티오스로부터 적법하게 총대주교좌를 물려받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니콜라오 1세(Nicolaus I: 858-867)는 급박하게 바뀐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상황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던 듯 싶다. 그는 특사 로도알드(Rodoald)와 자카리아스(Zacharias)를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보내 포티오스의 임명과 이그나티오스의 석연치 않은 퇴위를 둘러싼 진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사실 특사들에게는 더 큰 임무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성상파괴론자였던 비잔티움 황제 레온 3세(Λεών Γ')가 100여년전에 로마로부터 빼앗아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 관할로 삼게 했던 시칠리아(Sicilia), 칼라브리아(Calabria), 일리리쿰(Illyricum)의 관할권을 되돌려받는 것이었다. 니콜라오 1세는 포티오스의 총대주교좌 등극이 적법하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댓가로 황제가 강탈했던 관할교구들을 되돌려받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ㅡ 혹은 포티오스와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성직자들이 협상을 잘했던 것인지, 아니면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듯 뇌물이 효과적으로 작용했던지 ㅡ 특사들은 포티오스의 총대주교 취임이 적법하다는 것만 확인하고 로마로 귀환하고 말았다. 니콜라오 1세는 이에 크게 실망하였다. 여기에 불붙은 장작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대수도사제였던 테오그노스토스(Θεόγνωστος)가 교황을 알현한 것이었다. 이그나티오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의 손에는 테레빈토스(Τερεβινθος)의 수도원에 유폐된 이그나티오스가 자신의 폐위가 온당치 못하다고 호소하는 탄원 서한이 있었다. 고달픈 상황에 처한 이그나티오스의 상황에 격노한 니콜라오 1세는 863년에 라테라노(Laterano)에서 주교 회의를 소집하여 자신이 보낸 두 특사를 심문하고 징계하여 파문 조치하였다. 또한 그는 이 회의에서 포티오스를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으며, 만일 퇴위한 이그나티오스를 복위시키지 않으면 포티오스는 파문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여기에 더하여 동유럽 지역에서의 선교를 둘러싼 갈등이 동서교회 사이에 불거지기 시작했다. 포티오스가 총대주교좌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은 860년에 스칸디나비아 반도로부터 남하한 루시(Русь) 족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침입해왔다. 당시 황제 미하일 3세는 사모사타(Σαμόσατα)에서 아랍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이 대거 빠져 있었던 콘스탄티누폴리스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 때 포티오스는 설교를 통해 두려움에 떠는 시민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하느님을 신뢰하여 침략자들 앞에 굳건히 서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성모 마리아의 수의를 들고 성벽을 따라 행군하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그가 수의를 물에 적시자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포위하고 있던 루시 족이 퇴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폴리스 시민들은 환호하였고 교회와 포티오스의 인기는 이로 인해 더욱 높아졌다. 이 일이 있은 뒤에 루시 족의 사절단은 포티오스로부터 세례를 받아 개종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키예프 루시의 공식적인 개종이 있기 전에도 동방교회가 이 지역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미하일 3세와 포티오스는 주변국에 대한 선교 활동을 이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포티오스는 대학에서 함께 수학했던 오랜 친구인 키릴로스(Κύριλλος)에게 흑해 맞은편 연안, 카스피해 북부에서 세력을 떨친 하자르족(Khazars)에 대한 선교를 위임시켰다. 비록 유대교를 신봉하던 하자르족 지배층 사이에서 선교 사업이 매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키릴로스는 값진 성과를 얻었고, 이에 만족한 포티오스는 보스포로스(Βόσπορος)의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흑해를 부르던 옛 그리스어를 이용한 언어유희를 사용하며 다음과 같이 적을 정도였다.
불친절한 바다(Αξεινος Πόντος)가 친절한 바다(Εύξεινος Πόντος)로 바뀌었다네.
가장 야심찬 선교사업은 중부 유럽의 현재 체코 지역에 자리하던 모라비아(Moravia)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대(大)모라비아 왕국의 군주였던 라스티슬라브(Rastislav)는 서쪽으로부터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2세(Ludwig II)의 침공을 거뜬히 견뎌내고 있었으나 동프랑크 왕국이 갖은 뇌물로 왕국 동쪽에 있는 불가르족과 동맹을 맺자 위기감이 느끼고 있었다. 당시 불가리아의 군주였던 보리스 1세(Борис I)는 비잔티움 제국이 무슬림들과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발칸반도에서 세력을 떨쳐 영토를 확장하였고,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지역으로 야욕을 뻗치고 있었던 중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라스티슬라브는 불가르족과 대치하는 비잔티움 제국에 동맹의 손길을 뻗었으며 그러한 움직임의 한 방편으로 동방 교회로의 개종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를 환영한 포티오스는 하자르족 선교로 봉사하던 키릴로스를 모라비아로 보냈으며 그의 형제인 메토디오스(Μεθόδιος)도 함께 보냈는데, 이는 그 두 형제가 어려서부터 슬라브어에 매우 능통했기 때문이었다. 형제들은 성서와 기도문을 슬라브어로 번역하며 모라비아 선교에 헌신했다.9
선교사업은 뜻밖에도 불가리아에서 삽시간에 진행되고 만다. 863년 비잔티움 제국군은 파플라고니아(Παφλαγονία) 지방에서 라라카온토스(Λαλακάοντος)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아랍인들을 몰아낸다. 기세등등하게 수도로 개선한 비잔티움 군대는 자신감을 얻어 곧바로 불가르족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섭정이었던 바르다스는 864년 불가리아의 남부를 침공하였고 해군을 움직여 연안 지역을 봉쇄함으로써 교역을 원천 차단시켰다. 모라비아의 군대가 이에 호응하여 불가르족의 북부를 압박하였다. 이 협공으로 인해 불가르족은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받았으며 안 그래도 기근과 자연재해로 인해 인해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 불가르족은 결국 비잔티움 제국에 굴복하였고, 동방 교회에 귀의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는 불가리아를 통해 서방 교회의 세력권을 확대하려던 교황에겐 뼈아픈 타격이었다. 보리스 1세는 수도 플리스카(Плиска)에서 다른 불가리아 귀족들과 함께 비잔티움 제국의 성직자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렇듯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의 세력이 점차 확장되고 비잔티움 제국도 해외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되면서 니콜라오 1세의 라테라노 주교 회의 결정사항은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거의 무시되다시피 하였다. 포티오스는 여전히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좌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였던가. 상황이 불가리아에서 갑자기 난처하게 흘러가게 된다. 보리스 1세는 세례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에 성직자들을 많이 보내어 적극적으로 불가리아 사람들을 개종시켜줄 것과 기독교인의 삶과 사회상에 대해 자문해 줄 것, 불가리아에 자치 교회를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포티오스는 비록 선교 사업을 위해 불가리아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아직 신생 교회를 자치 교회로서 독립시켜 줄 마음은 없었기에 마지막 요청에는 난색을 표하며 보리스 1세가 만족할 만한 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이에 기분이 상한 보리스 1세는 세계총대주교와 불화를 빚고 있던 로마 교황에게 관련된 문의를 하였다. 니콜라오 1세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았고 106개에 달하는 상세한 답변과 더불어 대규모의 성직자단을 불가리아로 파송하였다. 로마에서 보낸 성직자단은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보낸 성직자단에 비하면 급이 더 높은 주교급이었다. 포풀로니아(Populonia)의 주교였던 파울루스(Paulus)와 훗날 교황이 되는 포르투스(Portus)의 주교 포르모소(Formosus: 891-896)가 이끄는 성직자단은 불가리아 교회에 서방 교회 전례를 도입하였고 이를 확산시켰다.
어느 주교좌의 관할 교구라는 명확한 규정이 없는 동일 지역에서 동서교회의 전례가 독립적으로 확산된 적은 이전에 없던 일이었다. 수백년간의 독자적인 발전을 통해 동서교회의 사회와 문화가 많이 달라졌고, 이로 인해 전례의 양식과 교회 문화도 많이 바뀌었는데 그것을 직접적으로 서로에게 선보이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불가리아 선교였다. 말로만 들었던 문화의 차이가 실제로 목격되었고, 이는 양 교회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정가도 심상치 않은 기류에 휩싸였다. 황제의 섭정으로써 사실상 전권을 휘두르고 있던 바르다스가 황제 미하일 3세의 친구이자 시종이었던 바실리오스(Βασίλειος)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바실리오스는 866년 공동황제에 임명되었는데, 이 일로 인해 제국의 분위기는 일순간 뒤숭숭해졌고, 서방교회의 세력이 불가리아와 결탁하여 제국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덩달아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의 불가리아 헤게모니를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으며, 특히 불가리아를 통해 접하게 된 서방교회의 신학과 전례를 매우 적대시하였다.
결국 포티오스는 867년 두 황제의 재가를 받아 고대 동방 총대주교좌인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에 서한을 보내 공의회를 소집한다. 포티오스는 불가리아에서 쫓겨난 동방 교회 성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서방교회 전례와 신학의 문제점을 낱낱이 연구하였고 이를 공의회에서 언급하여 서방 교회를 단죄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결국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열린 이 공의회에서 동방 교회 주교들은 로마 교황인 니콜라오 1세를 파문에 처하고 서방 교회를 단죄하였다. 파문과 단죄의 원인은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될 수 있었다.
비록 니콜라오 1세는 라테라노의 주교 회의에서 포티오스를 파문에 처하지 않았으나 이그나티오스가 총대주교좌에 복위되지 않았으니 사실상 포티오스를 총대주교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었고, 포티오스는 이에 더 나아가 니콜라오 1세를 아예 폐위 조치하였다. 동방 교회가 서방 교회의 수장인 교황을 파문에 처한 것은 400여년전 아카키오스(Ακάκιος: 472-489) 이후로 사상 두번째였다. 그간 쌓여왔던 불만과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한꺼번에 표출되어 포티오스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파문의 대상이었던 니콜라오 1세는 이 공의회의 결정 내용을 들어보지도 못한 채 11월 13일 선종하였다.
하지만 극적인 반전은 그 전에 일어난다. 공의회가 열렸던 그 해 9월 23일, 황제 미하일 3세가 공동황제였던 바실리오스에게 결국 암살당한 것이었다. 당시 미하일 3세는 술꾼이 되어 나라를 돌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전차 경기에만 열광하는 천치가 되어 있었다. 야심이 컸던 바실리오스는 결국 단독 황제가 되어 아모리움 황조를 끊고 마케도니아 황조를 열었다. 바실리오스는 서방 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포티오스의 적극적인 대립 정책에 반대하는 위치에 있었다. 포티오스 역시 그러한 바실리오스의 정책 변화를 싫어했고, 그러한 감정은 성 데메티리오스 축일이었던 10월 26일 새 황제 바실리오스에게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 적극적인 항의로 표출되었다. 그해 11월 결국 바실리오스는 포티오스를 총대주교좌에서 끌어내려 수도원에 유폐시키고 테레빈토스의 수도원에 감금되어 있다시피 한 이그나티오스를 수도로 다시 데려와 총대주교로 다시 임명하였다.
총대주교를 교체한 이듬해 황제 바실리오스(Βασίλειος)는 에프티미오스(Ευθύμιος)를 로마로 보내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가 바뀌었음을 알렸다. 당시 교황에 등극했던 하드리아노 2세(Adrianus II: 867-872)는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의 일이 로마 교회의 뜻대로 진행되었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황제와 이그나티오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콘스탄티누폴리스로 귀환하는 사절에게 전달했고, 내년에 로마에서 주교 회의를 개최할 테니 사절을 보내오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이윽고 교황의 의도대로 회의가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개최되었고, 867년 포티오스가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개최한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이 낭독되었다. 이 결의문은 성 베드로 성당 앞에서 소각되었고, 같은 시기에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도 소각되었다.
그리고 이그나티오스는 869년 10월 5일에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세계 공의회를 소집했다. 처음엔 12명의 주교밖에 참석하지 않은 이 공의회는 회기를 거듭할수록 참석자 수가 많아졌으며 27개의 법령을 채택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에는 성상공경의 재확인하고 총대주교 관할교구 내의 치리 등을 확인하는 법령도 있지만 포티오스와 총대주교좌에 영향을 끼치는 세속 권력에 대한 경고를 담은 법령이 더 중히 다뤄졌다. 관련 법령을 좀 더 자세히 보자.
이로써 포티오스에 대한 징계는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포티오스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먼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서방교회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동방교회의 수장을 따끔하게 혼내준 격이었고, 따라서 이후로는 동방 교회가 온 교회에 대해 수위권을 가지고 있는 교황의 의중을 잘 따르길 바랐다.
그런데 불가리아를 놓고 동서교회간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통교하던 불가르족의 군주인 보리스 1세(Борис I)가 다시 마음을 바꿔 서방교회와의 인연을 끊고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와 상통하게 된다. 갑자기 이 불가리아의 군주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보리스 1세는 불가리아에 찾아온 성직자들 중 포르모소(Formosus: 891-896)를 불가리아 대주교로 임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세속 권력이 성직자와 교구를 마음대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는 교황 하드리아노 2세의 입장은 단호했다.17 자, 14편에서 보리스 1세가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와 관계를 단절한 이유가 바로 불가리아에 자치 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희망이 꺾였기 때문이었던 것을 기억하자. 양다리 교회 정책을 펼치고 있던 보리스는 이제 다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와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는 불가리아 자치 교회르를 독립시키기로 결의하였고, 870년에 최초의 불가리아 교회의 수장으로서 대주교좌를 설치하였다. 불가리아 교회는 자치적이었으나 명목상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 산하의 교구였다. 이로 인해 서방 교회의 위신에는 흠집이 났고, 하드리아노 2세와 이그나티오스의 관계도 악화되고 말았다.
그러는 중에 포티오스는 유폐된 중에서도 활발한 연구와 저작 활동으로 비잔티움 제국에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제국 내에서는 여전히 포티오스에게 충성스런 성직자들과 학자들이 많았고 그가 제국과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지기를 희망했다. 바실리오스 황제는 정치적 상황이 안정되자 이그나티오스를 비롯한 보수파들의 행동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포티오스를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다시 불렀다. 그는 궁중에서 황제의 아들의 교육을 맡는 선생이 되었고, 대학에서 예전처럼 강의를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귀환에 환호했고, 그가 곧 생이 별로 남지 않은 이그나티오스를 이어 다시 총대주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어 877년 10월 26일, 포티오스는 세계총대주교로써 2번째 임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서방 교회는 포티오스의 재임(再任)을 인정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8세(Ioannes VIII: 872-882)는 이탈리아 반도가 노르만족과 아랍인들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를 요새화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장군 및 사령관에 스스로 취임하는 등 군사적인 리더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하지만 교황령의 군대만으로 이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동맹군이 필요하던 터였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군사적인 원조를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는 방책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879년 포티오스가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공의회를 개최했을 때, 교황은 추기경 페트루스(Petrus)와 안코나(Ancona)의 주교인 파울루스(Paulus), 오스티아(Ostia)의 주교인 에우제니우스(Eugenius)를 콘스탄티누폴리스에 특사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주교 이상의 고위 성직자들만 착용할 수 있는 팔리움(pallium)19을 선물로 가져갔다. 이는 교황이 이미 포티오스를 총대주교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포티오스가 개최한 공의회는 다섯 총대주교좌에서 온 주교들 383명이 참석한 세계 공의회였고 참석자 대부분은 포티오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주교들이었다. 이에 포티오스는 자신감이 충만해졌고 수년간 유배지에서 갈고닦은 복수의 칼날을 꺼내들었다. 포티오스는 879년부터 이듬해까지 이어진 이 공의회를 통해 869년 이그나티오스가 개최했던 공의회의 결정을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와 파문 조치를 모두 무효화한 것이고, 서방 교회의 관습과 전례를 비난한 것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니카이아-콘스탄티누폴리스 신경에 필리오케를 삽입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결의였다. 특히 마지막 결정의 경우 세계 공의회에서 결정되지 않은 필리오케 문구를 지역 교회 임의로 삽입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 그 필리오케가 함의하는 신학적 의미마저도 이단적이라고 부정했다. 아마도 포티오스는 수많은 기간동안 서방교회의 이중발출설을 효과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그리스 철학적 사고를 완성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교황의 특사들이 서방 교회를 배척하는 포티오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879년의 세계 공의회 결정사항을 인정한 이유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첫번째, 비잔티움 제국과의 화해를 관계 개선을 바라는 교황 요한 8세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했다. 두번째, 당시 로마 교회는 공식적으로 필리오케가 삽입된 신경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필리오케 문제를 양보할 수 있었다.21 더 중요한 실질적인 세번째 이유는 이러한 결정을 인정해주는 댓가로 불가리아의 관할권을 로마에 양보하고 동방 교회는 여기에 아무 권리도 주장하지 않겠다고 한 포티오스의 '당근 정책' 때문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불가리아는 이미 870년부터 자치교회를 운영하며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지라 이러한 약속은 피상적인 사탕발림에 불과했다.22
놀랍게도 교황 요한 8세는 이 세계 공의회의 결정을 승인하고 지난 869년의 세계 공의회를 무효화하였다. 그러나 라틴 전례를 저주하고 서방 교회를 폄훼한 879년 공의회의 결정 사항은 서방 교회 성직자들 사이에서 늘 논란의 대상이었다. 훗날 동서교회 대분열 시기 이후에 서방 교회 측에서는 이 공의회를 포티오스에 의해 꾸며진 거짓회의(Psuedosynodus Photiana)라 멸칭하여 그 명칭과 의미를 격하시켰다. 오히려 로마 가톨릭 측은 869년의 이그나티오스 주최의 콘스탄티누폴리스 공의회를 제8차 세계 공의회로 인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동방 정교회 측은 879년의 포티오스 주최의 콘스탄티누폴리스 공의회를 제 8차 세계 공의회를 인정하고 있으며, 반대로 869년의 세계 공의회를 강도 공의회라고 부르며 비난하였다.23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9세기 전까지 총 7차례의 세계 공의회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 공히 인정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8차 세계 공의회부터는 서로 다른 공의회를 각자 내세우게 되었고 심지어 각자가 인정하는 공의회가 상호 대립적이기 까지 하였다. 이것만 봐도 벌써 기독교 사회가 이전보다 더 큰 분열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전의 세계 공의회는 바른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위한 논쟁을 통해 이단을 정죄하고 정통 신앙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8차 세계 공의회는 상대편의 수장을 파문하고 정죄하기 위한 과정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세계 공의회의 의미조차 퇴색된 것이다. 8차 세계 공의회 이후로 동서교회의 주교들이 다 함께 모이는 세계 공의회는 드물었으며 이후에 세계 공의회라고 불리는 공의회에서 세계(ecumenical)의 의미는 모든 기독교 세계가 아닌 자기들만의 서방 교회 세계, 혹은 동방 교회 세계로 축소되고 말았다.
결국 이 거대한 분열 가운데에는 9세기 최고의 문제적 인물, 포티오스가 서 있었다. 비록 포티오스는 바실리오스를 이어 비잔티움 황제가 된 레온 6세(Λέων ΣΤ΄)에 의해 폐위되었지만 그가 남긴 분열의 유산은 정리되지 못한 채 후임 교황들과 총대주교, 비잔티움 황제들에게 떠넘겨지게 된다.
흥미롭게도 레온 6세의 치세 기간 중에 동서교회는 극적인 변화를 맞게 되는데,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로 인해 번영을 누리는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황제의 권력이 강해져 세계총대주교의 입지는 심각하게 작아졌다. 그리고 로마 교회는 요한 8세가 최초로 암살된 교황으로 기록되는 등 이때부터 암흑기에 돌입하게 되는데, 특히 세르지오 3세(Sergius III: 904-911)부터는 이탈리아 귀족 가문인 테오필락투스(Theophylactus) 가문의 귀부인들 ㅡ 특히 마로치아(Marozia) ㅡ 에 의해 교황권이 농단당하는 소위 창부정치(pornocracy)가 시작된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동서교회의 분열이니 일치니 하는 문제는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결되지 못한 포티오스 분열의 망령은 결국 동서교회 대분열(Great Schism)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낳게 된다.